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지철 (문단 편집) === 모친 === 1990년, [[서울신문사]] 여성월간지 에서 차지철의 어머니인 김대안^^(1898. 12. 06 ~ 1998. 12. 23)^^ 씨가 살아있다고 하여 보도한 바 있다.[[http://www.quee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1253|링크]] 당시 아흔 둘이던 차지철의 모친은 홀로 [[가난]] 속에 병마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차지철이 어릴 적부터 가던 [[교회]] [[목사]]가 그나마 [[경제]]적 도움을 줘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차지철은 어머니에게만은 엄청난 [[효자]]였는데,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에 믿을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땐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자 이 형제들이 꼬리 흔들며 찾아왔지만 차지철은 차가운 목소리로 "'''형제? 나에겐 어머님밖에 피붙이가 없는데 뭔 개소리냐? 다시 찾아오면 그땐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얼씬도 하지마라.'''"라고 하며 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그가 얼마나 [[효자]]였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박정희의 여름 휴가에 차지철과 함께 대동한 노태우는 박정희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차지철 보고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했다.''' 박정희가 다시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으나 [[파도]]가 얕게 치자 즉시 질겁하며 달려나갔다. 거의 [[공수병]] [[환자]] 같은 모습에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차지철이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고, 그 뒤로 박정희는 차지철에게 수영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차지철은 박정희를 거의 신처럼 떠받들었는데, 그런 박정희의 권유조차 어머니의 말보다는 후순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간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놀러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해당 골프장이 고향 [[이천시]]에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고 한다. 그외에도 전 중앙정보부장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계원]]의 모친이 편찮아서 안절부절 못할 때,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고 [[헬리콥터]]까지 빌려주는 등 "어머니"가 관련된 문제에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차지철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다.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집에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였다는 말도 있다.]를 달아줬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다 보니 김대안 할머니는 당시 이 월간지 인터뷰에서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겐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에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이라며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차지철이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한 큼직한 집이나 차와 돈은 어머니가 생전에 죄다 사기당하여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지인들은 차지철이 믿던 그 목사야말로 [[사기꾼]]이라며 비난했다. '''차지철이 그나마 어머니를 위하여 준비한 재산을 야금야금 다 먹었다'''고 비난했는데 당시 이 월간지에서 인터뷰하려고 하자 피했을 정도다. 참고로 당시 이 월간지에 나온 어머니는 [[달동네]]에서 볼 법한 허름한 집에서 [[텔레비전]]도 없이 이부자리와 정말 간단한 주방살림과 전자제품이라곤 커피 포트 하나 뿐인 [[빈곤층|극빈층]] 신세였다. [[치아]] 상태도 말이 아니라 [[밥]]도 못먹고 [[커피]] 포트로 쑨 [[죽]]만 겨우 먹을 수 있던 비참한 신세였다. 지인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그 목사가 경제적 도움이라고 주는 돈이 겨우 하찮은 [[용돈]]이나 던져주는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차지철 본인이 생전에 박정희의 채홍사 명령도 거절할 정도의 독실한 개신교인이었음을 생각하면 한편으로 씁쓸해지기도 하는 대목이다. 결국 김대안 할머니는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만 100세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여담으로 1997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 [[부부]]가 [[추석]]을 맞아 영락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다가 김대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하며, 같은 해 <여성동아> 10월호에서도 그간의 근황이 또 나왔다.] 사망 당시의 기사를 보면, 1981년 즈음에 차지철의 아내, 즉 며느리가 3명의 딸과 함께 모두 미국으로 건너가버렸고 차지철 외에 3명의 딸들도 일찍 사망하거나 혹은 미국으로 가버린 바람에 오랫동안 홀로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http://news.donga.com/3/all/19981225/7407261/1|링크]] 이후로 차지철의 친구들과 그 옛 부하들로부터 생활비와 병원비를 지원받았던 흔적이 포착된다. 98년 사망 당시에는 미국으로 건너간 며느리는 이미 2년 전에 죽은 상태였고, 손녀들은 끝내 빈소를 찾지 않은 듯. 미국으로 건너간 셋째 딸도 건강문제로 빈소를 찾지 않았다. 자식들 중에 빈소를 찾은 사람은 둘째 딸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