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차지철 (문단 편집) == [[김재규]]와의 관계 == 차지철은 박정희 시대 말기에 박정희 다음으로 가장 큰 권력을 차지해 횡포를 부리다가 [[10.26 사건|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서 김재규에게 피살되었다. 김재규 본인은 자신은 처음부터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부정적이었고,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 10.26 사건에 대해 잠깐 다뤘던 [[검정 고무신과 함께 하는 기영이의 5.18 여행]]에서의 대사 또한 '''이제부터 이 나라에 민주화가 올 것이다. 나는 내 생명과 민주화를 맞바꿨다''' 였다.] [[10.26 사건|10.26]]을 저질렀다고 법정에서 진술했지만, 한편으론 차지철한테 빡친(?) 김재규가 우발적으로 총을 갈긴 다음에 이왕 이렇게 된거 하면서 박정희도 쏘았다는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주장은 주로 김재규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이야기로 아래에 서술되는 차지철과 김재규의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주목한다. 하지만 김재규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도 차지철의 횡포가 김재규의 결심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는 편이다. 이쪽에서는 차지철의 횡포를 그대로 묵인하는 박정희한테 실망한 김재규가 거사를 단행했다는 주장을 많이 한다. 실제 김재규는 박정희가 정권 말기에 총기를 잃었다는 증언을 했다. 현대사 연구자들이나 언론인들 중에도 핵심 측근들간 의 충성 경쟁[* 소위 2인자 박치기]을 유도해서 자신의 권력기반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던 박정희가 유신정권 말기에 가면 차지철만 편애할 정도로 합리적인 사고력을 상실했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정희는 5.16 직후부터 1970년대 초반 유신 초기까지는 2인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절묘한 용인술을 보여주었다. 분야를 나줘서 여러 측근들에게 골고루 힘을 실어주면서 누구 한 명이 튀어 나온다 싶으면 바로 반대쪽에 힘을 실어주면서 제거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충성 경쟁을 유도했다. '''공화당 4인방'''(= [[김성곤]], [[백남억]], [[길재호]], [[김진만(정치인)|김진만]])을 키워서 [[김종필]]계를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키고, 그 뒤엔 다시 김종필계를 키워서 4인방을 정계에서 축출한게 대표적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종필]], [[김재춘]], [[박종규]], [[이후락]], [[김형욱]], [[윤필용]], [[강창성]], [[김재규]],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신직수]], [[김정렴]], [[김계원]], [[김현옥]] 등 수많은 인사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몇 년간 권세를 누리다가 다시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런 충성 경쟁에서 제대로 살아남은건 굽히는 처신을 하던 ~~영원한 [[2인자]]~~ [[김종필]]뿐이다.][* 특히 [[김정렴]]이 대통령비서실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차지철의 횡포가 더 심해졌을 것이다.] 차지철, 김재규는 각각 [[유신정권]] 말기를 지탱하던 경호실과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였고, 둘 다 엄청난 권력자였지만 사이는 [[견원지간]]이었다. 결국 차지철에게 밀려난 김재규가 [[10.26 사건|10월 26일에 일을 저지른 셈이다.]] 둘이 이리도 사이가 나빠진 원인은 바로 개인적인 관계 때문이다. 먼저 차지철은 김재규보다 8살이 어리다.[* 다만 김재규는 1924년생이라는 설이 있다. 그렇다면 10살이나 차이가 나는 셈.] 또한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일 때 전문학교까지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의 전문학교는 오늘날의 4년제 대학에 준하는 교육수준을 지니며, 해방 이후 전문학교 졸업자는 대학 졸업자로 소급 인정 받았다. 당시의 사회상으로 볼 때 전문학교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1% 내외에 불과한 초엘리트 그룹에 속했다.] [[광복]] 뒤에 박정희와 본인의 고향인 구미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육군사관학교]] 2기[* 박정희와 동기였다.]로 들어갔다. 반면 차지철은 서자였고, 공부는 곧잘 했지만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지 못해서 [[태권도]]를 비롯한 무술 실력 덕분에 포병 간부 시험에 합격했다. 알다시피 정식 장교인 육군사관학교 출신이 아니라서 차지철은 육사에게 엄청 열등감을 품었다. 그러다가 박정희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얻으면서 자기와 동급이거나[* 이때 경호실장은 [[장관]]급이었다.] 더 높은 위치[* 이때 김재규를 엄청 갈궜다. 중앙정보부장은 경호실장보다도 직급이 높았던 [[부총리]]급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직속상관인 김계원 비서실장조차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다녔다.], 심지어 군에 더 오래 머문 사람들[* 차지철은 예비역 포병 [[중령]] 출신이지만 박정희 때는 [[군사정권|군부정권]]이었기 때문에 정부 요직에 장성 출신이 수두룩하였다. 김재규는 [[제6관구사령부|제6관구사령관]], [[국군기무사령관|보안사령관]], [[제3군단|제3군단장]]을 지낸 예비역 중장 출신이고, 10.26 때 동석했던 김계원도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예비역 대장이다. 군 출신들은 특유의 계급문화가 있기 때문에 현재의 직급이 같다고 할지라도 군시절의 기수나 계급이 자신보다 높을 경우엔 선배 대우를 해주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다. 현재도 이럴진데 하물며 군이 가장 힘있는 집단이었던 70년대야 말할 필요도 없을것이다. 이는 명백한 차지철의 잘못이다.]을 하대했다. 김재규를 매우 싫어한 까닭은 또 있다. 차지철은 박정희 옆에서 [[5.16 군사정변]]을 주도했고, 정권 극초창기부터 박정희의 수족처럼 일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군인이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치다가 혁명 반대론자로 몰려서 감옥에 갇혔지만 박정희가 직권을 쓴 덕분에 겨우 풀려났다. 이후 6관구사령관,[* 현 [[수도군단]].] 방첩부대장[* 보안사령관], 3군단장을 지내다 중장으로 군 생활을 마친후 바로 유신정우회 1기 의원, 중앙정보부 차장, 건설부 장관을 거쳐 중앙정보부장까지 올라간 남자가 김재규다. 혁명을 반대한 사람이 '''박정희와 동기에 고향 후배라는 이유로''' 개처럼 일한 자신하고 직급이 같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 자체가 차지철을 무척 자극했다. 김재규에게도 차지철은 고까운 놈이었다. 일단 정통파 장교인 육사 출신도 아니고, 중장까지 올라간 본인과는 다르게 영관급인 중령에서 군 생활을 마치고, 일찌감치 정치에 뛰어든 주제에 다른 군 장성 출신을 무시하고, 과격한 행실이나 일삼았기 때문이다. 차지철은 [[육영수]]가 총에 맞아 숨진 뒤부터 자신이 소속된 경호실을 강화하여 또 다른 [[군벌]] 집단처럼 만들었다. 게다가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은 중앙정보부 관할이지만, 차지철은 국가 예산을 동원해 경호실 산하에 또 다른 정보 기구를 만들어서 정보를 수집했다. 박정희는 말년에 차지철을 중정보다 많이 믿었다. 평소부터 주먹질을 일삼던 차지철이 워낙에 쓴소리를 들었지만, 경호실장을 맡은 뒤부터 박정희에게 [[아부]]하면서, 자기 권력까지 키워 전횡을 휘둘렀다. 남들을 얕잡는 짓거리 때문에 차지철은 더욱 인망을 잃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는 차지철보다 나이도 많고, 군 계급도 높지만, 차지철은 김재규를 그냥 '''"김 부장!"'''으로 불렀다. 또한 '''박정희는 김재규를 매우 아껴 막내동생처럼 여길 정도로 사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였다.''' 이에 대해선 김종필, 김계원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권의 모든 인물들이 동의하는 내용이다. 군인 시절에는 박정희, 김계원, 김재규가 삼형제처럼 어울려 다녔으며, 좀 처럼 사람들에게 말을 놓지 않는 박정희가 김재규에게는 "재규."라고 부르며 하대했다고 한다. 김계원에 따르면 그게 오히려 문제가 되어 김재규를 질타할 때는 더욱 혹독했고, 김재규의 감정을 자극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 차지철에게는 존대를 하며 거리를 두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차지철이 충성 경쟁에 열을 올리는 요소로 작용했다. 박정희는 사적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인 김재규에겐 채찍질을, 그리고 정치적 수족이었으나 사적으로 거리가 있는 차지철에겐 당근을 주며 균형을 맞추고자 하였으나 김재규는 오히려 친밀한 사이인 자신에게 채찍이 다가오니 반감이 배가되는, 오히려 부작용을 일으킨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