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가학회 (문단 편집) == 역사 == 창가학회는 처음엔 종교단체가 아니라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라는 교육자들의 모임이었다. 창가(創價)란 '가치를 창조한다'는 뜻으로,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1871~1944)가 가진 교육 철학이 가치창조였다. 창가교육학회의 회원은 모두 각자 자신의 현장에서 마키구치의 창가교육을 실험하고 검증하며 교육이론을 더욱 발전시켰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자신의 독창적인 교육이론을 자신의 애제자 도다 조세이(戸田城聖)와 함께 체계화하여 남기고자 했다. 그래서 출판한 책이 바로 '창가교육학체계'이며 이 책의 발간일인 '1930년 11월 18일'을 훗날 창가교육학회의 창립일로 정했다. 그런데 창가교육학체계가 발간되기 전인 1928년, 마키구치와 도다는 함께 니치렌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이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의 '가치론'과 '가치 창조'라는 교육이념이 니치렌 불법 사상과 매우 깊이 공명했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을 '아이들의 행복'에 두고 교육 이론을 전개하여 만들어진 창가교육은 '만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법화경 철학과 매우 닮은 점이 많았다. 마키구치는 환갑에 이르러 고민 끝에 니치렌 불법에 귀의하게 된다. 이때부터 창가교육학회는 창가교육의 근저에 니치렌 불법의 사상과 수행을 두었다. 1947년에 도다 조세이가 조직을 창가학회로 개명한 후에는 니치렌 불법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하는 종교단체로 거듭나게 된다. 도다는 20세기 초 [[앙리 베르그송]]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떠오르던 생명주의를 통해 니치렌 불법을 이해하려 했고, '법신불(法身佛)은 곧 [[생명]] 그 자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붓다는 생명력 그 자체이며, 현세의 이익을 실현시켜 준다. 이로 인해 창가학회는 불교계 단체 중에서도 유독 현세구복적이고 현실참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1282년의 니치렌의 죽음 이후 니치렌 선사의 주장을 따르는 [[일련종]](日蓮宗)[* 일본어 발음은 니치렌슈]이 생겨났다. 일련종의 수십가지[* 현재 일련정종을 포함하여 약 30여 개 정도의 분파가 있다고 한다.] 분파 중 하나가 [[일련정종]](日蓮正宗)이다. 일련정종은 후지산에 위치한 대석사(大石寺)를 거점으로 하는, 니치렌이 직접 정한 본제자 여섯 명[* 1282년 10월 8일에 닛쇼(日昭), 니치로(日郞), 닛코(日興), 니코(日向), 닛초(日頂), 니치지(日持)로 정했다.] 중에서 닛코(日興)가 세운 종파이다. 이 일련종과 일련정종 대석사(다이세키사)의 창건까지의 경위를 대략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1282년 10월 13일 니치렌은 부슈의 이케가미[* 현재 [[도쿄]]도 오타구]에서 생을 마쳤다. 당초, 니치렌 대선사의 묘소는 본제자 6명을 비롯하여 총 18명이 매달 교대로 지키는 윤번제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윤번제는 지켜지지 않았고, 이미 3회기 무렵이 되자 닛코를 제외한 나머지 17명은 모두 찾아오지 않았다. 닛코를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지두나 가마쿠라 막부 관리와 영합하여 자신을 천태사문이라 칭하고 니치렌 대선사의 글을 불태우거나, 물에 빠뜨려 지워버리는 폭거를 저질렀다. 결국 닛코는 일련종의 타락을 우려하여 니치렌의 저작[* 소식문(편지)과 논문 그리고 초(抄) 등. 지금은 니치렌대성인 어서전집(日蓮大聖人 御書全集)이라는 책에 집대성되어있다. 안타깝게도 편지 중에는 수신인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을 전부 모아 미노부를 떠났고, 후지산 일대에 일련정종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대석사(다이세키사)를 짓는다. 그렇게 일련종에서 일련정종으로 떨어져 나옴으로써 종교의 타락을 막는가 싶었지만, 제3대 법주인 니치모쿠(日目)의 죽음 이후 600여 년간 일련정종 또한 본래 미혼이어야 할 법주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기 시작하고, 신도들에게 의식을 강요하여 돈을 빼앗는 등 종교적인 부패가 진행되어왔다. 그중에서 특필할 만한 사건이 바로 20세기 일본의 군국주의에 의하여 [[국가신토]]라는 사상 초유의 사상통일정책에 굴복하여 신찰을 허용하려 했던 일이다. 일제 [[군국주의]] 시절에 [[일본 정부]]가 [[신토]](국가신토) 중심의 사상 통일과 종교 통일을 추진하자 이에 겁먹은 일련정종의 승려들은 '신도의 천조태신은 근본이고, 부처는 그림자'라는 주장의 '''신본불적론(神本佛迹論)''' 등의 주장을 하여 이에 반하는 어서(御書) 중 14곳을 스스로 삭제하는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어서는 창가학회 및 일련정종을 비롯한 니치렌종(日蓮宗)의 교리의 근본이다. 자종의 교리를 삭제하는 행위는 종교적 신념도, 자존심도 완전히 버린 비굴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이 행위가 창가학회가 일련정종으로부터 독립하는 근본적인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당시(1940년대 초) 재가 조직(창가교육학회)의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와 그 제자인 도다 조세이는 니치렌 불법의 사상에 따라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이에 철저히 저항하며 신찰을 거부했다. 따라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와 [[천황]]에 대한 '불경죄'라는 두 가지 명목[* 참고로 [[일제강점기]] 많은 [[독립운동가]]와 일본의 지식인, 종교인, 아나키스트들도 함께 이 죄목으로 잡혀들어갔다. 얼마나 부조리한 악법이었는지 알 수 있는 사례. 당시 미쳐 돌아가던 일본제국의 입맛에 맞지 않던 수천, 수만의 지식인, 언론인, 종교인들이 사상범이라고 불리며 이 죄목으로 투옥되었다. 그리고 국가신토의 부정과 그에 따른 불경죄는 타 종교들에게도 입막음 수준이였는데. 메이지 시대 신흥 3대 종교에서도 세력이 가장 컸던 [[오모토]]도 현세 부정의 교리와 급진파들의 교단장악으로 인해 정부에서 불경죄 명목으로 1차와 2차 오모토 사건을 일으켜 교단 자체가 완전히 박살이 났다.]으로 투옥(1943년 7월 경)되었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는 투옥 약 1년 4개월 후, 1944년 11월 18일[* 놀랍게도 자신의 필생의 저서인 '창가교육학체계'의 발간일에 옥사했다. 이는 창가학회의 창립일이기도 하다.]에 옥사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7월 3일에 혼자 병약한 몸으로[* 출옥 전 약 75kg이었던 몸이 45kg 미만으로 줄었다고 한다. 키가 큰 편이었던 그의 체격에 비하면 뼈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물자가 귀한 전시였고 일본의 국민 대다수가 제대로 먹지 못할 때 범죄자 신분이었던 그에게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영양실조뿐만 아니라 류머티즘 등의 온갖 병을 옥중에서 얻었다고 한다. 결국 도다 조세이는 이때 얻은 병들로 인하여 향년 58세에 사망했는데 인간의 평균적인 수명에 비하면 상당한 단명이다.] 출옥한 도다 조세이는 창가교육학회를 '창가학회'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니치렌 대성인의 남묘호렌게쿄라는 근본법은 본래 교육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생활을 아우르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후 도다 조세이는 1958년 임종까지 단 10년 동안 80만 명에 이르는 조직으로 발전시켜 종교 단체의 기반을 다졌다. 그 뒤를 이은 제3대 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이후 창가학회는 더욱 급속히 성장하여 일본에서만 1000만이 넘는 인구가 신앙하는 거대 종교 단체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그에 반하여 일련정종은 닛켄이 법주 자리를 빼앗은 이후 교세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현재 창가학회에서는 그런 닛켄종에서 자연히 분리되어 종교의 타락을 피한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긴다.] 일련정종에서는 1979년 66대 법주가 의문스럽게 죽고 난 이후 66대 법주의 유언장에서 자신을 법주로 하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닛켄이 그 증거인 유언장조차 보이지 않고 67대 법주 자리를 탈환한다. 그리고 돌연 회장이었던 이케다 다이사쿠를 파문하고 회원들을 만나는 것을 금지한다. 승려는 위, 재가신도들은 아래라는 오만한 사고방식을 깨지 못한 닛켄은 신도들이 자신을 숭배하기보다 오히려 일개 재가신도에 불과한 이케다 다이사쿠를 창가학회의 지도자로서 존경하자 그를 질투한 것이다. 게다가 창가학회 회원들에게도 자신을 따르지 않으면 이케다처럼 파문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오히려 대부분의 창가학회 회원들은 그 일을 계기로 일련정종과 연을 끊어 창가학회가 독립된 단체가 되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국가신토에 의해 초토화되었던 일련정종은 한때 창가학회 회원들의 기증으로 전쟁 전의 수십 배 수준으로 급속히 번영했지만 이 파문사건 이후 창가학회와 단절되고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2023년 11월 15일 밤 창가학회(SGI) 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가 향년 95세에 도쿄 신주쿠 자택에서 사망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421/0007184503?sid=10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