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녕군 (문단 편집) == 역사 == [[원삼국시대]]에는 [[소국]] [[비지국]](比只國)이 있었다. [[가야]] 세력권의 땅이었다가 [[신라]]에 병합되었고 사서나 [[창녕 척경비]] 등에서 비자화군(比自火郡), 비자벌(比子伐), 비자본(比自㶱) 또는 비사벌(比斯伐)이라고 칭해졌다. [[신라]] 때인 [[555년]]([[진흥왕]] 16) 하주(下州)라 불렀다. [[757년]]([[경덕왕]] 16) 화왕군(火旺郡)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창녕은 [[양산시]]에 치소가 있는 [[양산시|양주]] 소속이었다. [[고려시대]]인 [[940년]]([[태조(고려)|태조]] 23)에 창녕(昌寧)으로 개칭하였다가 [[1018년]]([[현종(고려)|현종]] 9)에 밀성군(密城郡, 현 [[밀양시]])에 귀속되었다.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조선)|태조]] 3) 창녕과 영산에 현감을 두었다. [[1631년]]([[인조]] 9) 창녕현은 강등되어 영산현에 편입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현으로 복귀하였다. [[1895년]]([[고종(대한제국)|고종]] 32)에 대구부 창녕군, [[영산군(행정구역)|영산군]]이 되었다. [[1896년]] 대구부에서 [[경상남도]]에 속하게 되었다. [[1914년]] [[영산군(행정구역)|영산군]]의 대부분 지역이 창녕군과 합병되었다. [[1931년]] 남곡면을 남지면으로 개칭하였다. [[1955년]]에 창락면을 창녕면에 병합하였다. [[1960년]] 창녕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63년]] 남지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71년]] 남지읍에 고곡[[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1998년]] 행정조직 개편으로 고곡출장소가 폐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