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씨개명 (문단 편집) == 조선인들이 보인 반응 ==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조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에게 걱정거리다. [[미나미 지로|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성명서에서, 만약에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면 기쁘겠다고 분명히 시사하는 바람에 골치만 더 아파졌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윤치호는 1940년 6월 17일,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후 이토 치코(伊東致昊)로 개명했다.] >----- >[[윤치호 일기]] (1940년 1월 4일자)[[https://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sa&types=r&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sa_034r_0030_0010_0040&position=-1|#]]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직관적으로 '성을 갈아버리는 행위'니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교적 관점으로도 '충(忠)'의 대상인 왕조가 사라져버린 아노미 상태였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아이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이 설진영의 이야기를 일본인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족보(族譜)>라는 소설로 발표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족보(영화)|족보]]를 만들었다. 창씨개명은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 윤치호 일기:1916~1943(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463페이지]라고 말하며 저명한 친일파들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봤고 실제 페널티도 있긴 했지만 성씨를 바꾼다는 반감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외에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 기업인 [[박흥식(기업인)|박흥식]], [[방응모]] 등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체성이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 당시 일제가 미군 공습에 대비하여 실시했던 '방공연습'의 일본어(호코렌슈)와 발음이 비슷해서 놀림을 받았다.]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실제로 이 세대는 1945년 해방되어서도 우리 일본이 패망하였는데 왜 기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세대임을[* 물론 다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다.]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 무려 300년 이상을 지배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 스페인어를 아직도 쓰고 이름도 스페인 이름이거늘 전쟁까지 벌이며 독립했다. 스페인이 벌이던 차별에는 이들도 반발했고 [[시몬 볼리바르]] 같은 남미 독립 영웅도 심지어 스페인 계 핏줄이 흐르는 혼혈 귀족임에도 스페인과 남미는 다른 나라라고 주장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필리핀 독립을 이끌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여 년 지나도 일본에 대하여 일본어나 이름은 낯설지 않아도 차별이 이어질 테고 결국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창씨개명의 피해자들[*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갓난아기여서 '개명'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왠지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은 80세가 다 되거나 심하면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 말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