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저우시(허베이성)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중국 창저우 철사자 2.jpg|width=260]]||[[파일:중국 창저우 철사자.jpg|width=640]]|| ||||[[후주]] 시기에 세워진 6m 높이의 창저우 철사자. 현존하는 중국 최고의 야외 철제 조각상이다. --원조 싱하형-- |||| [[전한]] 시기 [[헝수이]] 동부와 함께 제후국인 하간국에 속했는데, 기원전 165년 그 계보가 끊기자 분할되어 [[기주]] 휘하의 발해군이 설치되었다. 발해군의 치소는 현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10km 떨어진 부양현이었는데, 후한 시기 서남쪽 30km 지점의 남피 (현 남피현)으로 옮겨졌다. [[삼국지]]의 [[원소(삼국지)|원소]]가 이곳 발해군을 거점으로 세력을 길러 기주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 [[북위]]의 [[태무제]] 때에 창수군으로 개칭되었고, [[효문제]]는 그 북부를 따로 떼어 부양군을 신설하였다. [[수나라]]에 들어 옛 발해군 지역에 체주(棣州)가 설치되었고, 606년 현 지명인 창주(滄州)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부양현은 창현으로 불렸고, 송대까지 창주의 치소로 번영하였다. 9세기 말엽에는 의창군 절도사 노언위가 일대를 기반으로 자립하였다가 [[이극용]]에게 토벌당하기도 하였다. [[후주]] 시기인 953년에는 일대의 랜드마크인 창저우 철사자가 세워졌다. [[원나라]] 때에는 하간로에 속했고, [[명나라]]의 하간부로 이어졌다. 14세기 들어 [[무슬림]]들이 정착, 현재까지도 다수의 [[후이족]]이 거주하고 있다. [[청나라]] 때에는 북쪽 천진부에 속했으며, [[중화민국]]기의 진해도와 [[국공내전]]기 창현전구를 거쳐 1983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한편 북쪽 20km 칭현에서는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지원 하에 칭현 반일 민주 정부가 세워져 지속적인 게릴라 전을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https://daydaynews.cc/en/history/hebei-anti-japanese-war-old-area-qing-county-cangzhou.html|세부 내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