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조론/가톨릭 (문단 편집) === '창조'에 대한 해석 === 신학으로서 나타나는 창조는 2가지의 방향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느님의 일로서 창조",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그것이다. 이 모두는 [[창세기]]를 바탕으로 하는 사유의 연장선에 있는 학문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우선적으로 봐야 하는 것은 창조가 창세기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이다. 창조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비판할 여러가지 부분들이 있다. 어째서 6일 창조인가? 누가 그것을 보았는가?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의 사실을 사람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모두가 정당하게 할 수 있는 의문이며, 비판이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Fact)을 말하지 않는다. 신앙을 통한 진리(Truth)를 말하는 책이다. 또한 오늘날에도 명확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아서 편집된 책이다.[* [[창세기]]는 [[바빌론 유수]] 시절에 유배 생활로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린 유대 민족을 위하여 당신의 제관으로 짐작되는 이들이 작성한 책이고, 그것을 읽는 우리는 21세기 종교의 자유를 누리며, 삶의 지혜를 얻으려는 사람이다. 당연히 삶의 자리가 차이가 나므로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의 자리에서 보아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삶의 자리를 기초로 살펴본다면, 그때에는 신에 관하여 논하는 것은 그 민족의 위치를 표현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바빌로니아 제국의 융성은 [[바알]] 신앙에 패배한 [[야훼]] 신앙이 아예 사라질 것 같은 위기로 다가오게 되었다. 하느님의 침묵, 하느님의 무력함에 대한 해석이 필요했다. 신앙에 대한 의미가 없다면 그들이 유대 왕국의 백성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빌론의 엘리트로 사는 것이 더 편했기 때문이다.[* 유배에 끌려간 이들은 혈통이나 여러 모로 뛰어난 사람들이 대다수였다.] 그들에게 현재와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므로 시원점, 그들의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현재의 것이 아니라, 시초의 것을 보려는 것은 바빌로니아의 창조설에 큰 영감을 받은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영향은 신앙의 원체험(그들이 신앙을 가지도록 이끈 결정적인 계기)을 [[출애굽]] 사건에 두는 유다인들의 신앙에 큰 변화를 주었다. 즉, 한 가족의 수호신에서 온 세상의 창조주, 세상 모든 것의 절대적인 주권자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해방체험이 그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하느님의 개입 하느님의 창조로 변화한 것이다. "이미" 개입했었고, "새롭게" 개입한 것이 출애굽 사건으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새롭게 개입하여, 그들의 유배생활에서 해방시켜주리라는 신앙이 그들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이끈 계기가 되었다. 그러므로 창조주 신앙, 창조라는 신앙항목은 철저한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의 일환이며, 세상의 의미, 그리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기억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