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창해군 (문단 편집) == 사료에서의 등장 == 다음은 창해군과 관련된 사료들이다. 작성된 순서대로 정렬하였다. >[[팽오]]가 [[동예|예]](濊) 및 [[고조선|조선]](朝鮮)과 장사하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gray (중략)}}} 이때 한(漢)나라는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1,000리에 걸쳐 식량을 운송해야[負擔] 했으므로, 대개 10여 종[* 약 64석]을 보내면 1석만 도착했으니, 공(邛)과 북(僰)들과 거래하여 그것(식량)을 모아야 했다. 수년이 지나도 길은 완성되지 않았는데, 만이(蠻夷)가 이를 노려 수차례 침공하니, 관리들은 군대를 일으켜 그들을 무찔러야 했다. 모든 파촉(巴蜀) 지방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하는 데는 부족했으므로, 이에 호민(豪民)들을 모아 남이(南夷)에서 경작하게 하여, 곡식을 지방관[縣官]에게 내게 하고 그 비용은 도내(都內, 중앙)에서 받도록 했다. '''동쪽으로는 창해군에 이르렀는데 인부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남이(南夷)와 비슷했다.''' >彭吳賈滅[* 문맥상 '멸하다'가 나올 자리가 결코 아니며, 보통 예(濊)의 오기로 본다([[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참고]]).]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閒靡然發動。 {{{#gray (중략)}}} 當是時,漢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饋糧,率十餘鐘致一石,散幣於邛僰以集之。數歲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至滄海之郡,人徒之費擬於南夷。 >{{{#!wiki style="text-align:right" 『[[사기(역사책)|사기]](史記)』 권30 평준서(平準書) 제8([[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030|원문]], [[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번역]])}}} >원삭 3년(기원전 126년), 장구(張歐)가 면직되니 공손홍(公孫弘)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이때는 서남이(西南夷)와 통교하고 동쪽으로는 창해군을 설치했으며, 북쪽으로는 삭방군(朔方郡)을 축성했었다. 공손홍이 수차례 간언하여 쓸모가 없는 땅을 받드는 일로 중국(中國)을 파폐하게 하니 폐지를 청하였다. 이에 [[무제(전한)|천자]]가 주매신(朱買臣) 등을 시켜 삭방군을 세워 얻는 편익을 들어 공손홍을 나무랐는데, (주매신 등은) 열 가지를 들었으나 공손홍은 한 가지도 반박하지 못했다. 공손홍이 즉시 사죄하며 "(제가) 산동(山東)의 비루한 사람이라 그러한 이점이 있는지는 몰랐는데, (그렇다면) 서남이와 창해는 폐지하고 삭방군에만 전념하시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임금이 이내 이를 허락했다. >元朔三年,張歐免,以弘為御史大夫。是時通西南夷,東置滄海,北筑朔方之郡。弘數諫,以為罷敝中國以奉無用之地,願罷之。於是天子乃使朱買臣等難弘置朔方之便。發十策,弘不得一。弘乃謝曰:「山東鄙人,不知其便若是,願罷西南夷、滄海而專奉朔方。」上乃許之。 >{{{#!wiki style="text-align:right" 『[[사기(역사책)|사기]](史記)』 권112 평준후 주부 열전(平津侯主父列傳) 제52, 공손홍([[https://zh.wikisource.org/wiki/%E5%8F%B2%E8%A8%98/%E5%8D%B7112|원문]], [[https://michigan358.blog.me/220801068451|번역]])}}} >원삭 원년(BCE 128) 가을, 동이 예군(薉君) 남려(南閭) 등이[*원주 [[복건]]이 말하길, "예맥은 진한의 북쪽, 고구려와 옥저의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대해에 이른다."라고 했다. 진작이 말하길, "예(薉, 본문의 글자)는 예(穢)의 옛 글자이다."라고 했다. 안사고가 말하길, "남려는 예의 군주 이름이다."라고 했다.[br]服虔曰: 「穢貊在辰韓之北, 高句麗·沃沮之南, 東窮于大海.」 晉灼曰: 「薉, 古穢字.」 師古曰: 「南閭者, 薉君之名.」][* 주석을 작성한 인물 중 예맥의 위치를 제시한 복건은 [[후한]] 말기의 인물이다. 여기서 복건이 말한 예맥은 기원전 2세기에 남려가 귀순할때 이끈 집단이 아니라 후대에 확립 된 [[동예]]와 착각했다는 견해가 있다. ] 구 28만인을 이끌고 항복하므로, 창해군으로 삼았다. {{{#gray (중략)}}} 원삭 3년(BCE 126) 봄에 창해군을 없앴다. >(元朔元年)秋, {{{#gray (중략)}}} 東夷薉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 為蒼海郡. {{{#gray (중략)}}} 三年春,罷蒼海郡。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漢書)』 권6 무제기 제6[[https://zh.wikisource.org/wiki/%E6%BC%A2%E6%9B%B8/%E5%8D%B7006|##]]}}} >팽오가 예와 조선을 뚫자 창해군을 두었는데, 이에 연(燕)과 제(齊)의 사이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gray (중략)}}} (흉노를 치고 삭방을 쌓던) 때에 또한 서남이(西南夷)로 통하는 길을 만들었는데, 인부[作者]들이 수만 명이었다. (이하 해석 상동)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gray (중략)}}} 時又通西南夷道,作者數萬人,千里負擔餽饟,率十餘鍾致一石,散幣於邛僰以輯之。數歲而道不通,蠻夷因以數攻吏,吏發兵誅之。悉巴蜀租賦不足以更之,乃募豪民田南夷,入粟縣官,而內受錢於都內。東置滄海郡,人徒之費疑於南夷。 >{{{#!wiki style="text-align:right" 『한서』 권24 식화지(食貨志) 제4[[https://zh.wikisource.org/wiki/%E6%BC%A2%E6%9B%B8/%E5%8D%B7024%E4%B8%8B|##]]}}}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에 예군(濊君)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를 배반하고 28만 구(口)를 이끌고 요동(遼東)에 귀속하였으므로, 무제(武帝)는 그 지역으로 창해군(蒼海郡)을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곧 폐지하였다. >元朔元年,,武帝年也.,,, 濊君南閭等,,【集解】 惠棟曰, 顏籀云, 南閭者, 薉君之名.,,畔右渠, 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wiki style="text-align:right" 『[[후한서]](後漢書)』 권85 동이(東夷)열전 제75, 예(濊)[[http://db.history.go.kr/item/compareViewer.do?levelId=jo_003r_0010_0060_002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