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채명신 (문단 편집) === [[해리 S. 트루먼|트루먼]] 전 대통령과의 만남 ===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이 맺어진지 약 10년 후, 채명신은 미 육군 지휘 참모대학에 잠시 유학을 떠난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은 은퇴 후 캔자스시티에 위치한 자신의 도서관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었고, 채명신은 참모대학 총장인 램리 장군에게 수 차례 부탁한 끝에 램리의 주선으로 트루먼 대통령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다. 만남의 자리에서 트루먼은 채명신을 무척이나 반가워하며 손수 커피를 끓여주는 등 격식없이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채명신이 한국민과 한국군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의사를 전하자 본인 역시 승전 군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받으면서 당시 백악관의 상황과 결정이 상세히 기록된 자신의 일기를 서재에서 직접 꺼내와 보여주었다고 한다.[* 채명신이 램리에게 사적인 자리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한 이유가 그 당시 백악관의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이야기를 듣고싶었기 때문이었다. ] 수첩에는 당시 파병부대의 이름들과 군 지휘부로부터 받은 보고들이 빼곡하게 적혀져 있었고[* 정확히 1950년 6월 24일 이후 상황이 기록돼 있었는데, 한 페이지에는 “오늘 육군장관으로부터 미군의 파병에 대한 건의를 받았다. 아울러 한국전 참전 부대의 리스트도 함께 올라왔다.”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그 바로 밑에는 수많은 부대 이름과 OX 표시가 꼬박꼬박 적혀있었다고 한다. 즉, 당시 트루먼이 장성들의 '''보고와 정보를 토대로 부대들의 파병 여부를 일일이 직접 결정했다는 것'''], 치열한 전쟁의 뒤편에 이런 고뇌에 찬 결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채명신은 사무치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트루먼은 그러고는 문득 맥아더를 경질한 자신의 결정을 한국인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국인들의 의견을 여과없이 듣고싶습니다'''''라고 물었다고. 채명신은 당시 트루먼과 맥아더의 정치적 관계[* 트루먼을 비판하는 세력의 일부는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한 맥아더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그의 결정 이면에 존재한다는 비난을 앞세우곤 했다.]를 고려해서 “한국민들은 맥아더의 해임 이유를 모르고 그가 그저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훌륭한 장군이라 믿지만 저는 압록강 전선에서의 후퇴에 분명 맥아더의 판단 착오[* 중공군을 향한 지나친 과소평가, 원폭 투하 이외의 대안 부재 등.]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공과 과에 대한 평가가 적절히 섞인 채명신의 답변을 들은 트루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실 그의 화려한 명성 뒤엔 작전상 중대한 과오가[* 실리를 추구하는 니미츠와 달리, 국민 사기를 진작할 수 있는 전과를 올리는 걸 더 중시했다는 평이 있다. 무엇보다 미국이 [[문민통제]]를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대공황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게 된 '''참전용사들의 시위를 탱크로 진압'''한 [[보너스 아미]](by 맥아더, [[조지 패튼|패튼]]) 사건이다.] 숨겨져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라는 다소 놀라운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발언은 상당히 중의적이어서 현재까지도 해석을 두고 논란이 많다. 1. 당시 맥아더를 향한 불신임을 솔직히 드러내는 발언이었다는 해석이 있고, 2. 지나친 과대평가로 인해 훗날 맥아더가 겪게 될 정치적 위기와 평가절하를 트루먼이 뭇내 우려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채명신은 훗날 회고에서 이 만남을 유학 시절 가장 의미있었던 순간으로 꼽는다고 밝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