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부인 (문단 편집) === 동정론 === >여후가 척부인을 학대하고 살해한 것은 매우 비인도적인 처사이므로 우리는 마땅히 질책해야 한다. 여후의 이런 행보는 그녀 자신을 중국사 치욕의 기둥에 영원히 못을 박았다. >---- > ''왕리췬(王立群), 중국의 역사학자. 허난 대학교의 예술사 교수.'' 척부인은 당시 상황들을 고려하면 정치적 야심이 있었다기보다 정치에 무지한 후궁이 타의에 의해 황권 투쟁에 휘말렸고 자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행동한 것에 가까웠다. 때문에 어리석었고 개인적인 처신을 잘못했다해도 끔찍하게 살해당할 정도의 중죄나 큰 잘못이었다고 볼 수 없었다. 인권 개념이 미미했던 과거에도 [[능지형]]과 [[거열형]] 같이 신체를 훼손하거나 죄인의 시체를 이용한 요리(젓갈)같은 잔혹한 형벌은 역모죄를 계획한 대역죄인에게만 가했었고, 경고 목적으로 대중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이런 잔혹한 형벌들을 단순히 분풀이 용도로 남용하거나 특히 남녀노소 안가리고 학살하는 것은 고대에서도 비난받는 행위였다. 당장 항우만 해도 학살과 팽형을 남발해 민심이 떠나 그가 몰락하게 된 원인이 되었고 후세 [[조조]]가 서주 대학살로 끝까지 비판받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척부인은 [[여희]]와 [[조비연]], [[성화제|만귀비]] 같은 역사 속 [[악녀]]들처럼 악랄하게 권력을 탐해 황족을 모독하고, 황제인 유방의 총애만 믿은 채 여후의 권위를 무시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황태자 교체가 실패한 이후 유방과 같이 슬퍼했다는 것만 빼면 그외의 잡음을 일으켰다는 기록은 없는 걸 볼 때, 척부인은 신하들의 대대적인 반대 이후 유여의의 황태자 옹립을 바로 포기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혜제가 이복동생이기 이전에 경쟁자가 될 뻔했던 [[유여의]]를 직접 도와주려고 한 것만 봐도, 척부인은 지속적으로 황태자 자리를 탐내지 않았고 여후 모자에게 해코지도 가하지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정말 척부인이 자의적으로 황권 투쟁에 뛰어들어 아들의 황태자 옹립을 추진하고, 더 나아가 여후와 혜제에게 해코지를 했다면 바로 국정을 농간한 역도로 몰려 처형당했을 것이다. 황태자 교체 실패 이후 신하들도 척부인의 행동에 반감을 가지면서 그녀는 제대로 된 지지세력도 존재하지 않았기에, 여후의 입지와 지위에 있어 위협조차 되지 못했고 사형을 당할 중죄와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여후는 복수심 때문에 세력도 명분도 없는 척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을 거두지 않고, 지나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일 정치적 목적의 숙청과 자신의 자리를 넘본 방자한 첩에 대한 처벌 목적이었다면 폐위와 유배로 충분했고, 정 죽여야했다면 참수나 독살, 교수형같이 법도에 적힌 처형법이나 육체를 보존할 수 있는 온건한 처형법으로 처형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여후는 제후국의 왕으로 봉해진 선황의 아들을 정식 절차를 통한 폐위와 처벌이 아닌 암살이라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죽여버렸고, 마찬가지로 선황의 후궁으로 황족이었던 여자에게 산 채로 잔혹한 신체훼손을 가하고 동물 취급을 하며 오물투성이에 버려 죽어가게 만든데다 그걸 자신의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정적 처리 및 법도에 따른 정당한 처벌로 볼 수 없는, 그저 개인적인 앙심에 의해 저지른 잔학무도한 [[사적제재]]에 불과하며[* 조선의 [[광해군]]이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의 폐모살제로 비판받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들을 참조.] 더 나아가 황제인 혜제를 모욕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작 여후는 유방의 생전에 그를 대신해 [[한신]][[토사구팽|을 포함한 공신들을 처리할 때]][* 물론 한신도 최후로 동정을 받고 있지만 이쪽도 생전에는 자신의 활약으로 교만해 처세술과 정치적 식견이 좋은 편이 아니였다.], 머리를 쓰며 정당하게 죽일 명분을 만들어내는 식으로 냉철하게 행동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지나친 원한에 사무친 것이 그녀의 실책으로 옹호받을 수 있는 선을 넘어버려 현세에도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원칙적으로 유방에게 책임이 있다. 유방이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고 한 것은 총애하는 여인의 소생이라는 개인적인 사심도 있지만,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를 이용해 여후와 외척인 여씨 일족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컸을 것이다. 적통을 떠나 여후의 아들인 유영을 배제한다면, 여후와 여씨 일족의 권세도 약해질 거라고 판단했던 것. 실제로 여후도 [[토사구팽]] 때 유방을 부추켜 [[팽월]]을 잔인하게 처리하고 이 영향으로 [[노관]]과 [[영포]]가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낳아 유방과 갈등을 겪었고, [[세도 정치|외척 세력에게 휘둘려서 국정이 망가진 사례]]는 무수히 많았기 때문에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는 것도 마땅히 군주가 해야 할 과제였다. 문제는 다른 좋거나 타당한 방법들도 있었는데 하필이면 정통성이 떨어지는 첩의 아들에 당시 10살도 안된 어린 유여의를 황태자로 삼으려는 실책을 벌였고, 이는 정통성 문제로 수많은 신하들의 반대와 여후의 증오만 낳는 결과를 낳았으며 '''그렇게 사랑했던 척부인과 유여의 모두를 암투에 끌어들여 사지에 밀어넣은 꼴이 되었다.''' 황태자 교체에 실패한 이후 유방도 자신이 죽으면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가 여후에게 보복받을 것이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슬퍼했다고는 하지만, 유여의를 보호해줄 신하는 주창 밖에 없었고 여후에게 대항할 수 있는 인재 확보나 보호 기반을 제대로 만들지 않은 것은 최악의 실책이라 볼 수 있었다. 차라리 한고제 유방이 직접 폐서인 등의 처분으로 쫓아내 버렸다면, '이미 선제께서 조치하신 일이다'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대는 신분제와 더불어 [[남존여비]]도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개개인의 성격을 떠나, 남자에게 의존하거나 순종해야 했으며 권력을 쥐게 된 케이스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닌 배경을 통해 얻은 것이 많았다. 여후도 정치적 식견까지 좋은 야심가로 당시에 드문 여인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런 여후조차 남편이자 황제인 유방의 권위 앞에서는 꼼짝 못하는 신세였다. 여후가 본격적으로 권력의 정점에 선 것은 고후기라 불리는 여후의 손자 대인 전후소제 섭정 시기인데, 두 황제가 어렸고 유방의 정실이자 유영의 모후, 두 황제의 조모라는 배경을 가졌기에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시대상 속에서 황태자 교체 사건도 황족들 중에서는 을에 속한 후궁, 그것도 민가 출신의 한미한 신분인데다 가무가 특기일 뿐이였던 척부인이 주도했다기에는 무리가 많다. 척부인이 진짜 주체였다면 유방은 여색에 미쳐 공사도 분간하지 못하는 무능한 암군으로 낙인찍혔을 것이고, 척부인은 황제의 총애만 믿고 친아들을 황태자로 삼아 정실의 자리를 탐낸 역도로 몰려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아있는 기록과 당시 법과 제도, 사회적 인식, 척부인의 입지를 고려하면 척부인이 스스로 유방에게 간청했다기보다, 유방이 먼저 유여의를 태자로 삼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하자 척부인도 맞장구를 치고 어떻게든 성공시키기 위해 호소한 것에 가까웠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한마디로 척부인은 정치력이 전무해 유방에게 거절 의사를 표현할 입지는 커녕, 성격도 되지 못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어쩌면 척부인이 정말 순진무구해서 황태자 교체로 인해 일어날 정치적 파장과 그 자리에 따라오는 책임도 모르고, 자기 아들을 황태자로 삼아준다는 말에 그저 좋다고만 생각하며 멋모르고 암투에 뛰어든 것에 가까울 수도 있다. 척부인과 여후 사이의 개인사를 다 제외하고 봐도, 당시 정세 속에서 척부인과 유여의 모자는 운이 매우 없었다. 일단 조나라가 수도 장안이랑 가까운 위치에 있었고[*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숙청하기 쉽다보니 조나라는 제 명을 살거나, 멀쩡히 재위를 마친 제후왕이 적은 것으로 유명했다. 유여의만 아니라 전임인 [[장오]]는 재상 관고가 계획한 반란 계획때문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퇴위했고 유여의의 후임이자 이복형제인 유우는 여후를 비방했다 감금되어 아사, 여후의 조카인 여록도 여씨 일족 숙청에 연루되어 참수당했다.], 유방 사후 척부인의 유일한 보호막이 되어줄 혜제는 즉위 당시에 고작 16살 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혜제는 경험이 부족해 재위 초창기부터 여후가 수렴청정을 했고,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의 나이도 11~12살 정도로 터무니없이 어렸다. 거기에 믿을만한 인재도 주창 한 명밖에 없었던데다, 조나라를 지킬 군사들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 사후 척부인 모자가 빨리 죽게 된 배경은 여후가 두 사람을 우선순위로 두고, 손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약한 기반과 압도적으로 불리한 환경의 비중도 컸다. 원래대로라면 출궁해 조나라로 가야했을 척부인을 바로 영항에 가둔 것부터가 이미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고, 설령 척부인이 조나라로 갔다 한들 유여의가 시간이 얼마 안걸려 장안에 온 것을 보면 척부인도 송환되었을 가능성은 높았다. [[박희]] [[문제(전한)|모자]]와 [[유비(전한)|유비]]가 여후의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다른 이유는 둘이 부임한 대나라와 제나라의 위치가 장안이랑 멀리 떨어져, 소식을 전하는데 지장이 있다보니 여후 몰래 군사력을 키우는데 좋은 환경이었던 것도 있었다. 특히 유비는 자신 휘하 땅을 이복 여동생인 노원공주에게 바칠 정도로 군사력은 수도 쪽 세력보다 우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