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준경 (문단 편집) === 생애 후기 === 뛰어난 활약을 보이자 하급 무관 신세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승진해 위위경(衛尉卿)[* 위위시(衛尉寺)의 차관. 종3품. 위위시는 부서명으로 왕실의 의장용 비품을 관리하는 부서다.] - 직문하성(直門下省)[* [[중서문하성]] 소속 서열 8번째 직위. 종3품.] 직위에 오른다. 이때 경험한 [[여진]]의 강대한 힘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척준경은 후일 이자겸과 함께 대금 사대를 주도했다. 척준경은 후대의 [[묘청]]이나 [[정지상]]과 달리 여진과 직접 싸웠고 큰 공을 세운 인물인데도 화의를 주장한 것이다. 정치적인 고려를 하고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지만 군사적으로는 전문가인 만큼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금나라]]에 사대하는 것이 전쟁보다는 낫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위의 활약상을 찬찬히 뜯어보면 알겠지만, 여진 정벌의 성과는 척준경 개인의 무예에 크게 의존했으며 당시 고려군 전체로 보면 실책이 많았던 데다가 여진족의 전술로 고려군 일부가 곤경에 처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 위기 때마다 척준경 본인의 힘으로 타개했는데, 바꿔 말하면 척준경이 아니었다면 크게 패하고 끝날 수도 있었던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척준경이 자기가 활약한 것만 생각하는 바보였다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전체적인 전황이 돌아가는 꼴을 보고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없었을 경우 여진족과의 싸움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았을 것이고, 그것이 대금 사대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믿고 따를 수 있었던 상관인 [[윤관]]과 [[오연총]]이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최홍정과 이관진 등 함께 활약한 장군 상당수가 잊혀져 간 가운데 척준경은 [[이자겸]] 일파가 되어 권세를 지켜냈고 이자겸의 지원으로 무신으로서는 꿈도 못 꾸던 정2품 벼슬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어 1126년(인종 4년) [[이자겸의 난]] 때 동생과 아들이 화를 입는다. 또 본인은 인종의 중재를 무산시키고 [[만월대|궁궐]]을 방화한다. 궁궐에 쳐들어간 후 불이 될만한 땔감 등을 모아서 궁성 동문 동화문(東華門)의 행랑에다 놓고 불을 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궁성에 불을 지른 뒤에 척준경은 말을 타고 자신의 친족들을 죽인 자들을 찾아다니다가 [[수춘궁]] 정문에서 기습을 당해 죽을 뻔하기도 했다. 분노한 척준경은 수춘궁에서 나오는 자는 모두 죽이라고 명했으며 왕의 침실까지 쳐들어갔지만 왕의 호위 무사 2명에게 패하여 퇴각하기도 했다. >2월 신유일.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 ~ 1135),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 ? ~ 1126)이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 상장군(上將軍) 최탁(崔卓, ? ~ 1126) ·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 ~ 1126), 장군(將軍) 고석(高碩, ? ~ 1126) 등과 함께 이자겸과 척준경을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도리어 이자겸과 척준경이 군사를 동원해 궁궐로 침범해 왔다. > >임술일. [[이자겸|그]]들이 [[만월대|궁궐]]을 불태웠다. > >계해일. 이자겸과 척준경이 왕을 협박해 [[연덕궁|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한 다음, 안보린·최탁·권수·고석과 숙위하던 [[좌복야]] 홍관(洪灌, ? ~ 1126) 등 17명을 죽였다. 이 외에도 죽은 군사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고려사』 권15, 세가15 인종1 인종 세력이 먼저 동생과 아들을 죽였으니 척준경의 행동이 이치에 맞지 않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인종 쪽도 국정을 농단하는 권신과 그 일파를 친다는 명분이 있었으니 이자겸 일파로 분류되던 척준경이 억울하다고 볼 수는 없다. 문하시랑평장사 - 판병부사(判兵部事)의 직위까지 올라간 척준경은 이자겸과 함께 최고의 권세를 누리며 누구도 손대지 못하는 인물이 된다. >백관들은 근처의 사관(寺館)으로 옮겨 임시로 붙어있으면서 수만 채울 뿐이었고 이자겸과 척준경의 위세는 더욱 강성해져 그들이 하는 짓을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였다. >----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이자겸]] 그러나 가만히 있을 인종이 아니었다.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를 이간질시켰고 이자겸과 사이가 벌어진 틈에 지다방사(知茶房事) [[최사전]]과 병부상서(兵部尙書) 김향(金珦, ? ~ 1135)이 척준경을 타이르고 이자겸의 난 이전에 낙향했을 때부터 자신을 신임해준 인종의 개입으로 척준경은 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맹세하게 된다. 난을 성공시킨 지 3개월 후인 1126년(인종 4년) 5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로 침입하려던 이자겸의 계획을 사전에 알게 된 인종이 척준경을 시켜 잡아 오게 했고 결국 이자겸은 모든 것을 잃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척준경은 이 변란을 막고 이자겸을 제압한 공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 - 수[[삼사(관직)|태보]](守太保) -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위에 오르게 된다. 이자겸을 몰락시키며 자신이 고려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1127년(인종 5년) 3월 [[정지상]], [[김안]] 등이 척준경의 죄를 물어 그를 탄핵하기 시작하였고 [[토사구팽|인종도 내심 척준경을 견제했는지 끝내 전라남도 신안의 엄타도로 유배를 보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고 권력자가 되었음에도 왕의 명령에 순순히 따라 유배길에 올랐다는 것. 모종의 이유로 군권을 빼앗겼거나 홀로 인종에게 직접 반기를 드는 행동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척준경의 정치적인 삶을 보면 주체적으로 뭔가를 도모한다기보다는 어떤 리더의 지도하에 움직임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최충헌의 경우는 아예 희종이 자신을 제거할 낌새가 보이자 폐위시키기 까지 하였다.] 척준경의 유배는 길게 보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과 [[무신정권]]과도 이어진다고도 볼 여지도 어느 정도는 있다. 전자의 경우 [[평양시|서경]] 천도론의 중심 인물이었던 정지상이 척준경을 탄핵한 공로로 정계의 중심 인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한편 여진 정벌 등의 전공으로 세력을 이루었던 무신들은 여진 정벌 이후 문신들의 견제로 이미 정계에서 밀려난 상황에서 남은 이들은 최고 전쟁 [[영웅]] 척준경에 동조하거나 그에 반대하여 대립하다가 많이 숙청당해서 한동안 무신들의 권력 공백 상태가 이어졌기에 후자의 측면에서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자겸이 척준경에게 던진 [[당근#s-2|당근]]은 그 이전까지 고려 최고 무관직 품계를 넘는 정2품의 벼슬이었다. [[중서문하성]] 차관인 평장사. 최고 무관직인 상장군은 정3품이다. 무관 출신 중 가장 높은 직위를 받은 신하는 [[숙종(고려)|숙종]] 대 상장군 출신 [[왕국모]]로 종2품 참지정사였다. 이걸 천우위 녹사 출신인 척준경이 깬 것.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이 몰락하고 이후에 척준경 또한 실각하면서 척준경 승진의 반작용으로 문신들의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해진다. [[무신정변]]이 일어난 실질적인 이유는 [[의종(고려)|의종]] 후반대의 지나친 문신 우대 기조 때문이기는 했다. 그래도 유배형에 처해진 이듬해에 인종이 그래도 본인을 구한 것을 생각해 그를 고향 [[곡산군|곡주]](谷州)로 옮겨주었고 이후에는 처자식들에게 척준경이 가지고 있던 직전(職田)을 돌려주라는 명을 하게 된다. 심지어 1144년(인종 22년)에는 신하로서의 충절은 잃었지만 또한 사직을 지킨 공로가 있으니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의 벼슬을 주라는 황명을 내리기도. 그러나 척준경은 이 결정이 내려진 지 불과 수십 일 만에 [[종기|등창]]으로 인해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