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척준경 (문단 편집) === 생애 초기 === [[황해도]] [[곡산군|곡산]] 출신으로[* 곡산은 [[고려]] 때 곡주(谷州)였다.] 가난한 [[향리]]이자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위공(拓謂恭)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의 향리는 맨 위의 호장부터 여러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호장, 부호장 정도 되면 [[지방(지리)|지방]]의 유력자로 상당한 권세를 가졌다. [[신라]] 말 혼란기의 지방 [[호족(한국사)|호족]]들이 고려에 귀부하면서 향리가 되었기 때문에 고려에서는 거의 호족이나 다름없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지방 세력들은 가병들도 뺏기고, 신분도 격하됐지만, 고려까지 호장(戶長)은 세력을 갖춘 지역 토호들이 임명되는 최고위직이었다. 척준경은 집안이 가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호장급이 아닌 일선 행정 업무를 담당한 하급 향리 집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의 지방제는 수령이 있든 없든 현에 행정 업무를 보는 향리들이 따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무술 연마를 더 좋아했는데 고려 시대는 과거에 [[과거 제도#s-3.2.4|무과]]가 따로 없었다. 고려의 무과는 [[예종(고려)|예종]] 때 무학재와 함께 잠깐 생겼다가 [[인종(고려)|인종]] 때 혁파되고 이후 [[공양왕]] 때 가서야 잠깐 생겼다가 고려가 멸망한다. 게다가 가난한 집안에서 무술에 뜻을 두다 보니 아무래도 학문은 자연스럽게 멀리하고 무뢰배들과 친해지기 쉬웠다. 나이가 들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고 한동안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문종(고려)|문종]]의 3남 계림후 [[숙종(고려)|왕희]]가 계림공이던 시절, 후에 숙종이 되는 왕희는 1077년부터 1095년까지 계림공으로 불렸다. 척준경이 차후에 활약한 나이를 감안하면 척준경은 대략 1070년 생이고 1090년 정도에 계림공 소속 종자로 들어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때 왕희의 저택은 계림부라 하였는데 고려에서는 3등작을 받은 왕족에게 제왕부를 봉해 관저로 삼게 해주었다. 척준경은 이 계림부의 소속 종자로 들어간다. 이때의 인연으로 1095년 계림공이 어리고 몸이 약했던 조카 [[헌종(고려)|헌종]]을 제치고 보위에 올랐을 때 '[[중추원|추밀원]] 별가(別駕)' 즉 추밀원의 말단 관리로 들어가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업무 등을 하는 주로 남반으로 지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