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성씨) (문단 편집) == 千 (영양) == 天씨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본관은 영양(潁陽) 단본으로 전해진다.[* [[경상북도]] [[영양군]]과는 한자가 다르다.이쪽은 英陽.]《[[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따르면 영양 외에도 개성(開城) ·강화(江華) ·광주(廣州) 등 무려 97본이 있으나, 모두 영양천씨의 세거지(世居地)를 나타내는 데 불과하다. 《영양천씨세보》에 따르면 시조는 명(明)나라 초기의 조신(朝臣)인 암(巖)이며, 그의 후손이 영양에 세거하였다고 한다. 중시조 [[천만리]](千萬里)는 명나라 조정의 무신으로 있다가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 휘하의 영량사 겸 총독장(領糧使兼總督將)으로 아들 상(祥) ·희(禧)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참전하여 평양 · 곽산(郭山)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도 많은 전공을 세웠는데, 명나라 군사가 철수한 뒤에도 그대로 남았다가 귀화하여 화산군(花山君)[* [[경상북도]] [[안동시|안동]]의 별호(別號)[[화산 이씨]]와는 관련없다.]에 봉해지고, 후일 충장공(忠壯公)의 시호를 받았다. 그의 저서도 《사암선생문집(思庵先生文集)》 2권이 전하고 있으며, 전북 남원시 금지면(金池面) 방촌리(芳村里)에 있는 그의 묘는 세칭 '천장군묘(千將軍墓)'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병자호란]] 이후 중국혈통 들은 다 잡아들이라고 명령했고 결국 은둔생활을 했다고 한다.은둔을 하면서 계속 밑으로 남하를 했고 영남쪽에서 번성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한국 영양천씨의 역사는 약 400년이 조금 넘는다. [[궁(성씨)|궁]]씨와 같은 3획으로, 2획인 [[정(성씨)#s-3|정(丁)]]씨와 [[복(성씨)|복(卜)]]씨 다음으로 적다. 인구는 2015년을 기준으로 하여 100,014명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