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사례 (문단 편집) ===== 고려 ===== [[정종(고려 3대)|정종]]은 [[서경(고려)|서경]]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으며 [[인종(고려)|인종]]도 [[묘청]]을 중심으로 [[서경(고려)|서경]]으로 수도를 옮기자는 [[서경 천도 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인종이 시도했던 서경 천도 운동은 [[김부식]]을 위시한 개경파의 반대로 실패하고 급기야 [[묘청의 난]]이 일어났지만 이마저도 주동자였던 묘청이 불과 17일 만에 [[조광]]에게 살해되고 서경군 또한 관군에게 진압당하며 막을 내렸다. [[숙종(고려)|숙종]] 재위기에는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 한양부에서 남경 승격은 선왕인 [[문종(고려)]] 때이다.]으로 수도를 이전하려는 구체적인 움직임이 있기도 했다. 풍수가인 [[김위제]]가 비기(秘記)인 [[도선#s-1.4|도선기]](道詵記), [[도선#s-1.4|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도선#s-1.4|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신지비사]](神誌秘詞)를 인용하여 국토를 저울로, 남경을 저울추에 비유하며 천도를 주장하였고, 1104년에 [[남경 별궁]]이 준공되어 숙종이 직접 남경에 행차하기도 하였으나, 이 때 남경은 서경처럼 지역 세력이라든지 지역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크지 않아 정치적 논의만 거친 채 흐지부지 끝났다. 다만 당시 '''남경개창도감을 설치하여 정식 궁궐은 조성'''을 했는데, 그 터가 현재의 [[청와대]] 자리다(!). 300 여년 뒤 이성계가 이 부지를 둘러보고 그 남쪽에 [[경복궁|궁]]을 지었으니, 그 당시 사람들은 설마 이 때 점찍은 땅이 고려 멸망 이후 한반도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의 [[풍수지리학]]적 분석처럼 조선시대부터 남경이 수도가 되고 해방 이후에는 [[남경 별궁]]의 자리가 [[청와대]]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그의 분석이 옳았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무신정권]]기의 끝무렵이었던 [[김준(고려)|김준]] 집권기인 1260년에는 [[여몽전쟁]] 항전의 한 방법으로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천도하기 위해 나득황을 파견해 조사하기도 하였다. 이는 [[삼별초의 난]]보다 11년 앞선 일이었다. [[공민왕]]은 수원(水原), 평양(平壤), 남경(南京)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다. 수원같은 경우는 왜구의 침략이 심한 시기라 신하들이 반대하였으며[* 당시 수원은 화성까지 포함하였으며 중심부가 해안에 가까웠다.] 차라리 훨씬 더 내륙에 위치한 청주가 낫다고 주장하였다. [[우왕]] 대에는 [[남경(고려)|남경]]으로 천도를 시도했으며 왜구를 피해 철원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도 고려하였으나 [[최영]]이 반대하였고 실행되지 않았다. [[공양왕]] 대에는 [[연천군|연주(漣州)]]와 한양 천도가 검토되었으나 모두 무산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숙종(고려), version=230, paragraph=3.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