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천도논쟁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우한 방문 ==== 난창 천도가 난황에 부닥치자 장제스는 1월 10일 직접 난창 천도론에 대해 우한을 설득하는 것과 군비 문제를 비롯한 각종 군사문제를 통합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난창을 출발하여 1월 11일에 우한에 도착했다. 1월 12일 자신을 환영하는 우창의 환영대회에 참석하여 연설했다. >"내가 오늘 처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한 민중에 의한 최초의 조계 회수의 대성공을 공축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최후의 승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결하여 중국국민당을 옹호하고 당의 지휘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한커우의 조계지 회수는 국민당이 영도한 결과이다." 이는 민중운동을 칭찬하는 듯 하면서도 국민당의 영도를 강조하면서 과격한 노농운동에 대한 비판이 담긴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1월 13일 한커우 각계 총사령 환영 대회에서 우한 연석회의 위원 첨대비(詹大悲)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오늘 혁명영수를 환영하는 우리들의 성대한 환영회는 마친 한커우 영조계의 회수시기에 거행하는 것으로 3가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장 총사령이 (...) 우한 민중을 한커우 영조계 회수로 나가게 지도할 수 있어, 불평등조약 취소의 발단이 되어 [[쑨원]] 총리의 뜻을 이을 수 있다. 둘째, (...) 우리들의 혁명영수가 민중을 계속 영도하려고 노력하여, 잔여군벌을 숙청하고 일체의 조계를 회수하길 희망 (...) 셋째, 현재 반혁명파, 가혁명파, 불혁명파가 (...) 비록 여러 유언비어로써, 도발하고 혁명의 연합전선을 파괴하려 하나, 우리의 장 총사령과 혁명영수가 영원히 우리를 인도하고 지도하여 견고한 혁명중심을 건설하고, 군벌, 제국주의와 모든 반혁명파를 타도하여 국민혁명을 완성하길 희망한다." 이는 장제스의 우한 방문을 우한 천도에 대한 인정으로 이으려는 연석회의의 의도가 담긴 연설이었지만 장제스는 이에 호응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현재 한커우 영조계는 이미 민중의 역량에 의해서 회수되어 외교상 공전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었다. 다만 회수 이후 우한 민중의 역량이 기득의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승리를 보장하기 위한 요건은 3가지이다. 1. 우한 공농상학계는 마땅히 단결해야 (...) 2. 우리의 이번 외교방침은 마땅히 영 제국주의 단독에 대한 것 (...) 3. 우리를 압박하는 것은 각국의 제국주의이지 외국인이 아니다. (...) 상인은 완전한 자본가가 아니기에 우리의 상계동지를 결코 구축할 수 없고, (...) 상계동지는 공농양계 동지에 대해 마땅히 특별한 우대를 해야 한다. (...) 내가 이상에서 말한 것을 총괄하면 첫째, 외교승리의 보장을 위해 반드시 각계가 일치단결한다. 둘째, 농공총상학병각계는 단결하여 정부의 지휘를 받는다. 셋째, 각계는 단결하기 위해 모두 중국국민당에 가입한다. (...) 이번의 외교 승리! 영조계의 회수! 중국이 80여년간 받아온 역사와 민국이 성립된 15년 내의 역사상 가장 영광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제국주의의 간섭에 대비해 민중운동이 국민당의 영도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에 1월 13일의 환영대회에서는 기존에 우한 천도를 주장하던 장제스가 난창 천도로 선회한 것을 비난하는 야유가 터져나오기도 했고 보로딘은 환영연회석상에서 "일부 혁명군이 노동자, 농민들을 압박하고 공산당에 반대한다. (...) 그러면 우리들 쪽에서는 그를 타도할 방법을 구해야만 할 것"이라고 발언하여 장제스 타도를 암시했다.[* 보로딘은 1월 11일에도 "현재 건국대강에서 말하는 군정시기에 대하여 많은 오해들이 있다. 군정시기에는 군사행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민중운동도 있어야 하고 군사행동과 민중운동은 상호보완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강연했는데 이 역시 장제스에 대한 비난이었다.] 1월 15일의 13차 연석회의는 난창 정치회의의 결정에 따라 우한 연석회의를 해체하고 정치회의 우한분회 조직을 따를 것인지를 논의했는데 회의 결과 연석회의 존치가 결정되었다. 이날, 한커우에서 우한 각계 및 각 당부 대표 400명이 참가하여 장제스 환영회가 열렸는데 이날 각계 대표는 장제스에게 조속한 우한 천도를 촉구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각계에서 당부와 정부와 우한에 오길 요구하는데, 나는 마땅히 중앙에 전달하여 각계의 희망이 충분히 만족될 수 있도록 정하겠다."라면서 자신은 군사의 진전에 따라 옮겨 다니기 때문에 주재지를 정할 수 없다고 밝힘으로 우한 천도에 대한 반대를 돌려 표현했다. 1월 17일, 장제스는 우한에서 회의를 소집했는데 우한 측은 이것이 연석회의의 일부라 주장하고 장제스는 중앙집행위원회 임시회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장제스는 상하이, 난징 공격 계획에 대해서 보로딘과 의논했지만 보로딘은 장제스에게 상하이에 가지 말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하고 난창으로 돌아와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