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도논쟁 (문단 편집) == 배경 == 1926년 3월의 [[중산함 사건]]으로 국민정부 주석 [[왕징웨이]]를 실각시키고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을 굴복시켜 당무정리안을 받아내어 국민당을 장악한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부터 주장해 왔던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1926년 7월,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써 북벌을 선포했고 [[탕성즈]]의 8군을 중심으로 호남, 호북의 [[우페이푸]] 세력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어 7월 14일 장사를 점령하고 9월 6일 한양, 9월 7일 한커우에 이어 10월 10일 우창을 점령하여 [[우한]] 삼진을 모두 장악함으로 호남과 호북에 대한 군사작전을 대부분 완료했다. 하지만 호남과 호북 공략 과정에서 원래 호남이 기반이었던 [[탕성즈]]는 휘하의 [[허젠]], 이품선, 섭기, 하두인을 중심으로 장제스에게 군사적 영도권을 내놓지 않으며 호남, 호북에서의 군공을 독점하여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북벌 이전부터 국권을 장악하려 했던 장제스에 대한 큰 위협이었다. 결국 호남과 호북의 지배권을 두고 장제스와 탕성즈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자 장제스는 탕성즈를 제어하기 위해 국민당 중앙당부 와 국민정부를 우한으로 천도할 것을 제안했다. 이는 탕성즈의 세력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장제스의 제안에 따라 천도논쟁이 드디어 현안에 올랐지만 여기에 중산함 사건 이후 벌어진 [[영왕운동]]과 더불어 강성해지는 장제스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당권파와 [[중국공산당]]의 장제스 견제 운동이 벌어지면서 논쟁은 위험한 수위에 이르게 된다. 1926년 10월 15일 중앙위원회에서 보로딘은 탄옌카이와 장인걸에게 장제스의 비군사 부문 직책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왕징웨이에게 전권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반장운동은 더욱 거세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