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리푸 (문단 편집) === 숙청과 말년 === [[국부천대]] 과정에서 장제스는 CC계 제어를 위해 [[장징궈]]와 [[천청]]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타이베이로 천도한 이후 [[천청]]이 새롭게 행정원장에 취임하자 천청은 입법원에 행정원이 행정명령으로 법률을 조율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했다. 이는 과거 [[허잉친]]이 행정원장에 있던 시절까지 행정원장이 가지고 있던 권한이었으나 [[리쭝런]]과 허잉친의 권력다툼 과정에서 입법원이 회수한 권한이었다. 하지만 천리푸가 장악한 입법원은 천청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분노한 천청은 다음과 같이 입장을 표명했다. >"수권안은 여전히 그들 CC파에 의해서 부결되었다. 지금부터 행정원장은 오직 천리푸가 담당해야 할 것이니, 본인은 곧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행정원이 업무 정지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당연히 천청을 지지했고 결국 천리푸는 천청과의 싸움에서 완전히 패해 외딴 섬에 유배를 가야할 처지에 놓였다. 천리푸는 마지막 승부수로 1950년, [[쩌우루]], [[쥐정]], [[위유런]] 등 원로들을 움직여 장제스에게 국민당 개조를 청했으나 장제스는 천리푸를 호출하여 당장 대만을 떠나서 자신이 죽기 전까지 돌아오지 말란 지시를 내렸다. 이에 천리푸는 가족들을 거느려 미국으로 망명했으나 1969년 귀국하여 군학교장, 총통부 자정, 중국의약학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1970년 한국의 [[건국대학교]]로부터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중국 공산당]]에서도 그를 존경하는 인물이 많았기 때문에 [[덩샤오핑]] 집권 시절에는 3차 [[국공합작]]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오라는 제의를 덩샤오핑으로부터 여러번 받았다. 대만이 민주화된 이후로는 [[장쩌민]] 등의 공산당 인사들과 여러 번 만나 [[대만 독립운동|대만 독립 반대]] 등을 표명하기도 했다. 2001년 사망하였는데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4대가족]]의 마지막 일원이 사망하였다고 그의 죽음을 매우 자세히 조명하였으나 정작 중화민국에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