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마총 (문단 편집) == 발굴조사 == [[파일:1530755214ADD_thumb580.jpg]] 발굴조사 전 천마총의 모습[[http://www.srbsm.co.kr/default/index_view_page.php?idx=29743&part_idx=295|출처]] [[1970년대]] 초, [[박정희]] 대통령은 [[도굴]]되지 않은 [[무령왕릉]]이 우연히 발견된 이후로 고분 조사, 그리고 새로운 국보급 유물이 홍보 효과도 크고 민족주의 교육 수단으로 유용함에 주목했다. 박정희 본인이 한때 [[교사]]였던 만큼 상당히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실제로 2015년 9월, [[박근혜]]가 [[경주 월성]] 발굴 현장을 찾기 전까지 고고학 발굴 현장을 직접 찾은 유일한 대통령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유독 경주를 많이 찾았는데 그때마다 어린 박근혜와 함께 간 경우도 많아 훗날 박근혜의 월성 발굴 현장 방문은 아버지의 과업을 잇기 위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박근혜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2013년 중국 국빈 방문 일정 마지막에 [[진시황릉]] 방문을 넣어 병마용갱 발굴 현장을 찾았다.] 천마총 발굴조사는 박정희가 애착을 보인, 1971년부터 진행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경주의 주요 역사 유적 관광은 이때 박정희가 설계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때 초기 계획은 황남동 왕릉지구를 정비하면서 가장 큰 제98호분([[황남대총]])을 발굴, 복원해서 내부를 공개하는 것이었다. 황남대총은 신라와 경주는 물론이고 국내를 통틀어서 가장 큰 고분이기 때문에 역대급으로 중요한 유물이 반드시 나오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발굴기술도 미진했고, 거대한 무덤을 제대로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하기에는 경험이 아직 부족했다. 천마총 이전에 신라 대형고분을 한국인 학자들이 발굴조사한 것은 일본인 학자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 생몰년: 1907-2011. 조선총독부박물관의 마지막 박물관장이었다. 광복 이후에 일본으로 귀국하여 1957년 교토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71년에 은퇴하고 1980년에는 나라현립 카시하라 고고학연구소(奈良県立橿原考古学研究所) 소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의 협조로 발굴한 [[호우총]]과 [[은령총]] 정도뿐이었다. 게다가 2년 전 [[무령왕릉]] 발굴은 발굴부터 조사까지 모든 과정이 단 하루 만에(17시간) 졸속으로 끝났던 일이 있어서 고고학계는 이런 발굴에 굉장히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정희의 의지는 확고했고 학자들은 대통령의 뜻을 막을 수가 없었다. 대신 처음부터 황남대총을 발굴하지 않고, 먼저 조금 작은 고분을 발굴하면서 경험을 쌓은 후 시도하기로 했다. 이때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 황남대총과 동서로 마주보고 있던 제155호분, 천마총이었다. 여러 고분들 중 천마총을 선택한 것은 천마총이 경주의 고분들 중 고유번호 마지막인 155번이었던 것도 한 이유였고, 황남대총 바로 옆에 있어서 시대 양상이나 무덤 양식, 크기의 차이만 있지 비슷하리라 추정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천마총도 황남대총보다 작을 뿐 대형고분이었으므로 천마총에서 어지간히 유물이 나오면 박정희도 만족하여 황남대총 발굴을 강요하지 않길 기대한 것이다. 1973년 4월 6일, 조사단은 제155호분을 발굴하는 첫삽을 떴다. 그런데 시범 삼아 해보았을 뿐인 고분에서 '''대박이''' 터졌다. 7월부터 8월까지 두 달사이에 [[천마총 금관]](국보 제188호), [[천마총 관모]](국보 제189호), [[천마총 금제 허리띠]](국보 제190호), [[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국보 제207호) 등 부장품 1만 1297점이 출토된 것이다. 이렇게 출토된 유물 중 상술한 4점이 [[대한민국의 국보|국보]]에 지정됐으며, [[대한민국의 보물|보물]]로 지정된 유물도 [[천마총 금제 관식]](보물 제617호), 천마총 금제 관식(보물 제618호), [[천마총 목걸이]](보물 제619호), [[천마총 유리잔]](보물 제620호), [[천마총 환두대도]](보물 제621호), [[천마총 자루솥]](보물 제622호) 등 총 6점이나 된다. 천마총에서 기대를 뛰어넘는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던 1973년 8월 6일에는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는데 여기서도 역시 초대박이 터졌다. 천마총 발굴은 같은 해 12월 4일 마무리 되었으며 3,451명이 발굴, 조사에 동원되었다. 다음 해 11월에는 천마총 발굴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피장자의 키는 160cm 내외로 추정된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307290023910700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3-07-29&officeId=00023&pageNo=7&printNo=16096&publishType=00010|#]] 천마총 발굴은 정권 차원에서도 관심이 상당히 높아서 발굴 전 과정을 촬영해 홍보용 영화로 제작할 정도였다. 1973년 7월 3일에는 박정희가 직접 천마총 발굴현장을 찾아와서 현장에서 일하는 단원들에게는 [[금일봉]]을 무려 100만 원[* [[http://www.busanilbo.com/view/busan/view.php?code=20070621000431|#]]]씩이나 지급하는 등 지원을 했다.[* 당시 인부들 하루 인건비가 600원, 발굴조사원이 1200원, 소갈비 1대가 500원이었다.] 박정희가 천마총에 보인 관심은 대단했는데 1973년 7월 발굴된 천마총 금관은 당일 실측 및 조사를 마치고 그날 저녁 서울로 보내져 다음 날 아침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고 한다. 당시 금관을 가지고 간 정재훈 전 문화재관리국장은 박정희에게 금관에 대한 설명을 쭉 했더니 박정희가 [[김종필]] 국무총리, [[김정렴]] 비서실장, [[박근혜]]를 호출했고 이들이 15분만에 다 모였다고 술회했다. [[천마총 금관]]은 지금까지 발굴한 금관들 중 가장 크다고 하며, 한국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스란히 발굴해낸 최초의 금관이다. [[천마도]]는 [[자작나무]][* 실제로는 자작나무가 아니라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 등일 가능성이 높다.] 수피로 만들어 천수백 년간 산성 토양 속에 파묻혔는데도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된 것이 기적. 2010년 11월 13일 방송된 [[역사스페셜]]에서 천마총 발굴 당시의 이야기가 소개됐다.[[https://www.youtube.com/watch?v=ULrr6oQQKm4&ab|#]] 2023년 4월 6일, 발굴 50주년을 맞아 당시 참여자들의 간담회가 열렸다.[[https://www.youtube.com/watch?v=S_xUoFsIBjA|#]]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