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수이볜 (문단 편집) === 총통 재임 === 타이베이 시장에서 낙선한 뒤에, 민주 진보당의 2000년 총통 선거 후보로 거론되다가 마침내 출마했으나 당초에는 당선권에서 밀려난 상태였다. 이 때의 판세를 보면 전무후무한 민선 [[타이완 성]]장을 지낸 무소속 [[쑹추위]]가 독주했다. 쑹추위는 원래 [[중국 국민당]] 소속이었으나 총통 후보를 놓고 갈등을 벌인 끝에 제명되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 밑으로 현직 부총통이자 국민당 후보였던 [[롄잔]]과 [[민주진보당]]의 천수이볜이 2위를 두고 경합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국민당의 이런저런 부패 스캔들을 놓고 [[롄잔]]과 [[쑹추위]]간에 [[병림픽]]이 벌어지면서 쑹추위의 지지도가 하락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당시 총통이자 중국 국민당 주석이었던 '''[[리덩후이]]'''의 치밀한 각본이라는 설을 내놓고 있다. 실제로 리덩후이는 1994년 타이페이 시장 선거 때 국민당 출신 자오사오캉(趙少康)이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국민당 소속 현직 시장 황다저우(黃大洲)가 이런저런 실책으로 당선권에서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 없이 수수방관한 끝에 기어이 천수이볜이 당선되는 것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산데다, 퇴임 후에는 공식적으로 '''천수이볜과 같은 대만 독립론자임을 밝혔다.''' 1위 쑹추위의 지지도 하락이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청렴한 이미지'''를 내세워 몇몇 여론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하는 상승세를 타게 된다. 결국 천수이볜 4,977,737표, 쑹추위 4,664,932표, 롄잔 2,925,513표로 '''최초의 민주 진보당 출신 총통'''으로 등극함과 동시에 '''대만 정치 역사상 최초의 정권 교체'''를 이룩한다. [[파일:Bpb2Ext.jpg]] (2000년 5월 거행된 총통 취임식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이자 대만 최초의 여성 부총통인 [[뤼슈롄]]) 천수이볜은 기존의 국민당이 주창했던 국민당판 '[[하나의 중국]]' 원칙을 반대하였고, '타이완 [[독립]]'을 [[분리주의|주장했다]]. 이 때문에 [[중국]] 본토와 국민당 정치인들과 [[대립]]하였다. 사실 천수이벤 총통은 초기에는 중국을 자극할 생각은 없었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반대하는 천수이볜 총통이 눈엣가시이니 대륙과의 사이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가 없었다. [youtube(D6E2tKYsh1k)] 천수이볜 - [[롄잔]] [[2004년]] 총통 선거 [[텔레비전]][[토론]]. [[PTS]]에서 진행되었다. ||<-7> [[제11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 결과 || ||<|3> 기호 || 후보명 ||<|3> 정당 ||<|3> 득표수 ||<|3> 득표율 ||<|3> 순위 ||<|3> 당선 여부 || || 총통 후보 || || 부총통 후보 || ||<|2> '''1''' || '''천수이볜''' || '''[[민주진보당]]''' ||<|2> '''6,471,970''' ||<|2> '''50.11%''' ||<|2> '''1''' ||<|2> '''당선''' || || '''[[뤼슈롄]]''' || '''[[민주진보당]]''' || ||<|2> 2 || [[롄잔]] || [[중국 국민당]] ||<|2> 6,442,452 ||<|2> 49.89% ||<|2> 2 ||<|2> 낙선 || || [[쑹추위]] || [[친민당]] || ||<-2> 선거인수 || 16,507,179 ||<-2> 투표수 ||<-2> 13,251,719 || ||<-2> 무효표수 || 337,297 ||<-2> 투표율 ||<-2> '''80.28%''' || [[파일:ROC_2004_Presidential_Election_Township_level.svg.png]] 총통 재임 기간 동안 경력이 화려했다. 2004년 총통 선거 유세 중에는 타이난 시에서 [[천수이볜 암살 미수 사건|암살 미수 사건]]도 있었다. 바로 다음날 치러진 총통 선거 결과, '''0.2%p''' 남짓한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였던데다가 주요 방송국에서 시청률을 이유로 득표를 미리 추산해서 발표하는 막장사태 때문에 개표 초반에 국민당 후보가 앞서나가고 예측치가 실제 득표치보다 더 많이 나오는 막장사태가 터져버렸고, 이때문에 개표가 마무리 되었을 때 즈음에는 [[롄잔]]과 [[중국 국민당]] 쪽에서는 [[자작#s-1]]극이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대만 대법원에서 재검표까지 갔는데, 25,563표차로 표차가 줄어들기는 했는데 승부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타이완 [[분리주의|독립]]!' 선언으로 인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전면전까지 갈 기세였지만 당시는 2000년대 초중반이라 중국의 군사력이나 국력이 일정 궤도에 오르기 전이라서 별 일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롄잔]] 측은 [[타이베이]]를 비롯한 대만 북부와 [[타이둥]]을 중심으로 한 동부에서 크게 이겼지만, 암살 미수 사건이 터진 [[타이난]]을 비롯한 남부 지역에서 크게 패하면서 결국 근소한 차이로 천수이볜이 당선 되었다. 그러나 천수이볜이 집권하면서 2001년 [[닷컴버블]] 붕괴의 여파로 인한 전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사상 최초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면서 한차례 몸살을 앓았던바 있고 2002년과 2003년에는 IT 버블의 충격에서 회복되면서 다시 경제가 성장하나 싶었지만 얼마 안가서 (대만 입장에서는) '''운 안좋게도'''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LG전자]] [[LG디스플레이]] 등 '''[[대기업/대한민국|한국 대기업]]들의 [[치킨게임]] 공세'''에 대만 IT 기업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간다. 대만 중소기업들은 경쟁 대기업들이 경쟁 상품 가격을 내려버리는 치킨 게임을 시작해버리면 자본력이 딸리기 때문에 얼마 버티지 못한다. 이때 [[일본]]의 [[반도체]] 기업(엘피다 등)도 줄줄이 쓸려나갔다. 자연히 대만 경제는 침체했고, 그 와중인 [[2004년]] [[대한민국]]한테 1인당 [[국내총생산]]이 역전당하게 되어 보수 언론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대만보다 [[국민총생산]]이야 당연히 컸지만, [[인구]]가 많아서 1인당 GDP는 [[2004년]]에 와서야 역전하게 된다. 다만 2004년부터 2007년까지의 경제 성장률로만 본다면 이 당시 대만의 경제 상태는 '''의외로''' 나쁘지는 않았다. 2004년에 6.5%, 2005년에 5.4%, 2006년에 5.6%, 2007년에 6.5%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기 때문에 사실 한국보다 경제성장률은 높았다. 다만 문제는 경제성장률이 상당하다 한들 '''임금수준이 오르지 않았던데다가'''[* 사실 90년대 후반부터 대만의 임금수준이 동결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대만기업들의 중국진출에 따른 산업공동화를 막을려면 이 길밖에 없다는 산업계의 논리에 정부가 굴복한 결과물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20년가까이 지속되다보니까 대만의 임금수준이 한국보다 훨신 쳐져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물가는 안정세를 유지하고는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중국 진출에 따른 수익의 상당수가 부동산으로 흘러가면서 부동산 가격은 몇 배로 상승했고 집세까지 상승하면서 결혼을 늦추는 신혼부부들이 늘어나고 말아 결과적으로 대만의 출산율이 밑바닥 수준까지 떨어지는데 공헌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집세가 오르다보니까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는 참사[* 1990년대 당시 대만의 출산율은 1.6-1.8명대로 한국보다 조금 높았는데 2000년대 중반 들어서 출산율이 1명대 초반으로 급속히 떨어지게 되었다. 대만이 한국처럼 1997년 외환위기를 겪었던 것도 아니고 출산율이 급속히 떨어지게 된 원인이 임금정체와 월세비 상승이 큰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다.]가 벌어지게 되어버렸다. 대만 기업들이 싼 노동력을 찾아 본토로 옮겨가는 동안, 천수이벤 정권은 이런 변화에 대해 별다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했고, 그것 때문에 한국에 뒤쳐지는 계기가 되긴 했다. 싸구려 노동력만 쫓는 대만 기업의 속성과 무모한 중국과의 적대 정책으로 중국의 경제 성장에 대만을 동조시키지 못한 것이 큰 실책이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중국의 개방기 당시 싼 노동력을 확보하고자 중국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고 중국 시장을 선점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중국 정부의 중국 기업 편애나 지식재산권 침해같은 문제점 때문에 대중 투자가 다시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초창기 중국시장의 엄청난 소비자들과 노동력을 활용하지 못한 점은 한국과 일본 산업계를 이롭게 했다. 그렇다고 [[반중]]을 명분으로 삼고 있는 천수이볜 정권으로써 [[중국/경제|중국 경제]]에 의존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므로 천수이볜으로써는 어찌 해야될지 모를 노릇이었을 것이다. 결국, 천수이변의 외교정책은 표 결집같은 인기 몰이에 집착하고 명분에 치우쳐 실리를 놓치는 외교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버렸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부터 천수이볜 본인과 뤼슈롄 부총통, 천수이볜의 부인인 우수전 여사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되면서 지지율을 까먹었고 천수이볜 버전 [[중화민국송#s-2]] 같은 조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천수이볜의 부패 의혹은 [[2000년]] 총통 선거 직후부터 계속되었다. 2000년 총통 선거가 끝나고 선거 비용을 정산하기 위해 대만의 선관위에 제출한 자료에서 선거 비용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2위였던 [[쑹추위]] 선거 비용의 1/4 수준밖에 안 됐다. 심지어 [[1998년]]의 천수이볜 타이베이 시장 재선 선거 비용보다도 작았다.)[* [[대한민국]]에서도 [[선거]]가 끝난 이후 선거에 출마한 모든 후보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선거 비용을 정산해서 [[영수증]]과 사용 내역을 제출해야 하는데, 예측된 선거 비용(중앙 선관위에 가면 볼 수 있다. 각 선거구 별로 선거 비용 최대 상한선이 있고, 지금까지 해온 선거들을 평균내서 만든 평균 선거 비용도 있다)보다 지나치게 선거 비용이 적게 제출되면(당연히 상한선을 초과한 선거 비용이면 당선 무효) 선관위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에 고발한다.]. 2004년 총통 선거에서도 경쟁자였던 [[롄잔]]의 선거 비용에 비해 천수이볜의 선거 비용은 절반 정도로 제출되었고, 계속해서 선거 비용을 유용한게 아니냐는 소리가 나왔다. 이게 [[2006년]] 천수이볜 아들(천즈중 말고 한 명 더 있는데 이쪽이다)과 처가 쪽의 [[주가조작]] 사건과 더불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2008년]] 퇴임하자마자 구속을 당하게 된 것. 결국 2008년 재판을 앞두고 '''"2000년과 2004년 선거 자금을 모금하여 합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나(천수이볜)의 부귀를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라며 공금 유용을 인정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민진당(대만)|민진당]]은 대충격에 빠졌고(천수이볜의 저 발표가 나오고 민진당 지지율이 한자리수로 떨어졌다!) [[차이잉원]]이 구원 투수로 당 대표에 오르는 계기가 된다.(출처 : 차이잉원 자서전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 2008년 2월에는 대만 정부에서 [[코소보]]를 [[코소보/독립 인정 국가 목록|독립국가로 공식 승인]]했다. 유럽에서 대만을 국가로 인정하는 곳은 [[바티칸]] 뿐이다(정확하게는 바티칸이 직접 외교를 안 하고 [[교황청]](Holy See)이 외교를 처리하지만 [[바티칸]] 문서 참고). [[대만/외교]] 참조. 물론 많은 유럽 국가들이 대한민국처럼 대표부를 두거나 해서 비공식적으로 대만과 교류하고 있지만 포르투갈, 노르웨이처럼 대표부도 두지 않는 국가들도 꽤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Foreign_relations_of_Taiwan#List_of_countries_with_diplomatic_relations_with_the_ROC|여기 지도에서 푸른색 말고 회색으로 표시된 국가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한편 대만 정부가 코소보를 공식 승인한 것에 대해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논할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다.[[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1963730?sid=104|#]] 마잉주 정권도 코소보의 승인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