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유런 (문단 편집) === 반장운동 ===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고 우한 국민정부를 계속 지지하였으나 급진적 노동자들이 일으키는 폭동과 과격한 기업 파괴 운동에 불만을 품고 정부로부터 이를 단속할 것을 요구했다. 7월에 이르러 [[왕징웨이]]가 [[국공합작]]을 종식하려 하자 이에 대해 [[쑹칭링]], [[허샹닝]] 등과 함께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결국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난창 폭동]]이 발생했을 때는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국민당 좌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쑹칭링]], [[장파쿠이]]와 함께 국민당 혁명위원회 위원에 추대되었다. 이후 국민당의 청당 조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쑹칭링]], [[덩옌다]]와 함께 화물선을 타고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떠났는데 이 때문에 쑹칭링과의 염문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11월 1일 <중국과 세계 혁명 민중에 대한 선언>으로 불리는 모스크바 선언을 발표,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를 조직하여 한동안 소련에서 거주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의 혁명 역량을 폄하하면서 장제스와 다시 합작할 것만을 요구했다. 스탈린의 냉담한 태도에 실망한 천유런은 1930년, 프랑스로 떠나버렸는데 이때 장런제의 넷째 딸 장여영과 사랑에 빠져 결혼식을 올렸다. 둘의 나이는 무려 31세(!)가 차이 났고 이 때문에 장런제가 크게 반대했지만 왕징웨이의 중재로 장런제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1931년, [[1차 양광사변]]이 발발하자 [[쑨커]], [[쉬충즈]]와 함께 [[장제스]]와 광동파의 화해를 주선하려 했으나 장제스가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포기하고 [[영국령 홍콩]]으로 외류를 떠났다. 이들은 [[왕징웨이]]와 회담을 가지고 5월 27일 개최된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감찰위원회 비상회의에 참여함으로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정부위원 겸 외교부장에 취임하여 [[일본 제국]]의 원조를 얻어내고자 했다. 난징 측의 감찰위원 [[우징헝]]은 5월 29일, 비상회의에 참석한 반장파 22명을 분석하면서 천유런을 제3당으로 분류하고 쓰레기 더미로 비난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고 난징과 광저우의 통합을 조건으로 12월 15일, [[장제스]]가 퇴진하고 [[영월합작]]이 이루어지자 [[구웨이쥔]]의 뒤를 이어 외교부장에 임명되었으나 외교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대일 교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무리한 대일항전론, 대일절교론을 내세우다가 전국적인 비판을 받았다. 1932년 1월,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함에 따라 [[쑨커]] 내각이 붕괴되었고 쑨커와 함께 동반사퇴하여 [[뤄원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자시는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이후 [[천지탕]], [[리쭝런]]의 서남정무위원회에서 일하면서 서남지역의 외교사무를 담당하였으며 1933년 [[박의일 체포사건]]이 발생하자 강경하게 박의일 석방을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