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주당(베이징) (문단 편집) === 서당 === [[파일:천주당 서당.png]] 서직문의 천주당 서당 천주당은 라자리스트희의 페드리니 신부가 [[옹정제]] 때인 1725년에 서직문 대로에 있던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건립한 것이다. 육당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 속편>에서 근대의 서양화는 언제 어떻게 조선으로 들어왔습니까라는 제목으로 적었다. 서양화가 동양으로 처음 전해진 것은 중국 [[명나라]] 말에 [[예수회]] [[신부(성직자)|신부]]가 [[베이징]]에 들어가서 [[천주교]]를 [[선교]]하며 [[예수]]의 기적도와 [[성모 마리아]] [[이콘|성화]]를 내보인데서 비롯하였다. 조선인이 서양의 화풍을 알게 된 것도 그로 인해서다. 기록을 빌리면, [[병자호란]] 직후 인질로 청국에 연행되었던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서양인 신부 [[아담 샬]]과 친밀히 접촉하다가 1645년 초에 귀국하게 될 적에 그 신부에게서 천주교 교리책을 포함한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상 그림 한폭을 얻어 갖고 왔는데 아마 그것이 서양화가 조선에 들어온 처음일 듯하다. 또 당시 베이징의 동서남북 4곳에 세워져 있던 천주당 중의 서당은 특히 조선의 사신 일행이 즐겨 찾아가 서양식 창벽화 등의 신기함에 놀라곤 하였다. 그러한 그림은 진작부터 여러 관람자의 기행문을 통해 국내에 알려지다가 1780년에 베이징에 다녀온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 양화 항목으로 그 천주당에서 본 희한한 실상이 소상히 기술됨으로써 많은 사람이 양화를 관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이징에서 전래된 양화의 실물을 보는 일도 있게 되어,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양화의 유채 재료와 사실적 색상을 설명한 항목까지 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