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천진사변 (문단 편집) === 관동군의 음모 === 만주사변은 일본군 내부의 일부 과격한 장교들이 육군 중앙의 통제를 피해서 독단적으로 일으킨 것으로 만주에 대해서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할지에 대해서 결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1931년 4월, 일본군 육군참모본부가 편찬한 <쇼와 6년도 정세 판단>에 따르면, 일본군은 만몽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1단계를 국민정부의 주권 하의 친일정권의 수립, 2단계를 만몽 독립국가 건설, 3단계를 일본의 만몽 점령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육군대신과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일본군 육군 수뇌부는 1단계를 시행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맨 처음 [[이시와라 간지]]는 만주를 일본이 완전히 점령하여 일본의 영토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친일 괴뢰국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최고지배를 지나인에게 맡겨서는 끝내 불가능하다. 기껏 만들어봐야 종래와 마찬가지 폐해에 시달릴 것은 뻔한 일이다. 고로 백척간두 일보를 나아가 중앙정부는 이를 완전히 일본에 위탁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시와라의 과격한 주장에 대해서 육군 중앙은 물론이고 만주사변에 참여한 장교들조차 반대하였다. 9월 22일, 관동군 참모장 미야케 미쓰하루가 주재한 관동군 참모회의에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가타쿠라 다다시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은 <만몽 문제 해결책안>이라는 것을 결정하여 선통제를 수뇌로 하는 독립국 건설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만몽 문제 해결책안>은 상당히 느슨한 합의로 이시와라는 끝끝내 만몽의 영유를 주장했으며 도이하라는 일본인이 맹주가 되는 오족공화국을 주장하는 등 의견이 엇갈렸다. 여기서 러시아반장 [[하시모토 긴고로]]와 육군 중앙이 파견한 다테카와 요시쓰쿠 작전부장이 만몽 영유론을 가차없이 반대하면서 중앙의 뜻을 분명히 하자 이시와라도 끝내 독립국가 건설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관동군은 [[장징후이]], [[위안진카이]], [[장하이펑]],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등을 움직여 곳곳에서 자치위원회를 수립하게 하는 한편 [[탕위린]], [[마잔산]] 등 거취가 결정되지 않은 군벌들을 포섭하였다. 허나 [[와카쓰키 레이지로]] 내각은 만주사변 불확대 방침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고 [[시데하라 기주로]] 외상이 국민정부와의 협상을 주장하는 등 군부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려 했다. 하지만 이 움직임은 만주사변 초반에 불확대 방침에 동조하고 있던 육군 중앙이 9월 30일, 만몽에 독립정권을 수립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함에 따라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본군은 10월, 금주를 폭격하였고 국제적 고립의 위기에 처했고 10월 사건이라 불리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결국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하였다. 사태가 악화되자 참모본부 작전과장 [[이마무라 히토시]]는 관동군 측에 만주에 독립정권을 세울 것을 재촉하였다. 이때 청조 복벽을 꿈꾸던 황족 출신의 아이신기오로 시치아는 관동군에게 푸이를 기용할 것을 계속 요청하였다. 당시 독립국가 건설을 제일 먼저 주장하고 있던 것은 도이하라였는데 도이하라는 공화국을 지지하였으나 필요하다면 푸이나 [[쿵더청]]을 끌어들여 군주정을 세우는 것도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톈진 조계#s-4|천진의 일본 조계지]]에서 출생한 우노 신타로의 증언에 따르면, 도이하라 겐지가 지휘하는 봉천 특무기관은 이미 1931년 4월에 푸이를 위한 대원수 군복을 맞춘 상태였다고 한다. 여하튼 도이하라는 이타가키와 함께 푸이를 포섭하기 위한 움직임에 착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