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진사변 (문단 편집) === [[청나라 소조정]]의 갈등 === 1931년 9월 30일, 일본군 천진주둔군 사령부 통역관 요시다 츄타로(吉田忠太郞)가 푸이를 예방하여 천진주둔군 사령관 가시이 고헤이(香椎浩平) 중장이 긴요한 일로 만나고 싶어한다고 알렸다. 푸이는 즉시 천진주둔군 사령부를 방문하였는데 푸이가 가보니 이미 사령부에는 나진옥과 이타가키 세이시로가 파견한 사절인 우에카도 리이치(上角利一)가 와 있었다. 가시이 중장은 우에카도를 소개시켜주고 곧바로 나갔고 그는 시치아가 보낸 편지를 전달하였다. 시치아의 편지에는 20년간 기다렸던 기회가 오늘에야 마침내 왔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고 조상들의 발상지로 가서 큰 계획을 도모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푸이가 움직이기만 한다면 관동군은 즉시 군함을 보내 푸이를 [[관동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푸이는 이 제안에 대해서 정샤오쉬와 진보침과 좀 더 상의해 보는 게 낫겠다고 여겨 돌아가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가시이 중장이 나타나 톈진의 치안이 불안정하니 동북으로 떠나기를 희망한다고 말하였다. 푸이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일본인들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여기고 자신이 들은 것을 유신들에게 말하였으나 진보침은 나진옥이 또 경솔하게 일본인들의 말에 부화뇌동하여 실수한 것이며 일본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였다. 호사원, 진증수 등 다른 유신들도 비슷한 의견이었다. 진보침은 동북의 정세변화와 국제열강의 태도, 동북의 민심을 두루 살펴본 후에 결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이미 황위에 눈이 먼 푸이는 시치아가 거짓말을 할리가 없다고 진보침의 간언을 무시하였다. 이에 진보침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의 뜻이 다시 사람에게 돌아오고, 일의 형세가 반드시 이치대로 되며, 옛날을 회복함이 어찌 소신이 일평생 바라던 바가 아니겠사옵니까? 다만, 국세가 어지러우니 경솔하게 일을 처리하면 가기는 쉬어도 돌아오기가 어려울까 근심되올 뿐이옵니다." 하지만 노신의 충언에 푸이는 늙은이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불평하면서 정샤오쉬를 데려오라고 명령했다. 정샤오쉬는 진보침보다 3살 연하로 역시나 노인이었으나 일찍이 문호개방을 주장하고 [[베니토 무솔리니]]와도 교류하는 등 과단성 있는 인물이라 자신을 지지하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정샤오쉬도 신중론을 주장하였다. >"뒤집고 뒤집힘이 반복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만주의 정세는 필시 먼저 광복이 필요한 것이며, 일본은 폐하를 맞아들이지 않고선 역시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동하시는 시기는 퉁제후가 돌아온 후에 정하심이 보다 타당하리라 여겨지옵니다." 다음날인 10월 1일, 톈진 영사관 부영사 고토(后藤)가 푸이를 찾아왔다. 영사관 측은 의외로 푸이에게 만주로 가고 싶은 그의 심정은 이해하지만 톈진을 떠나는 것은 위헙하니 푸이를 보호하는 책임을 맡은 자신들의 입장에선 톈진에 남아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요시자와 켄키치]]와 인연이 깊었던 진보침은 문치통치가 합당하다 여겨 일본의 내각이 만주사변 불확대 방침을 주장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군인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하였지만 푸이는 일본 정치가들보단 일본 군인들이 더 믿을 만하다고 여겼다. 이어 푸이를 고무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는데 천진주둔 영국군 사령관 니잔트 준장이 푸이를 예방하고 푸이가 다시 만주에서 황제에 오른다면 자신은 푸이의 신하가 되길 원한다고 푸이를 부추겼다. 푸이는 이를 두고 영국이 일본이 지지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여겼다. 여기에 푸이의 스승인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신의 회고록인 <자금성의 황혼>의 출판에 앞서 푸이에게 서문을 청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푸이에게 만주로 돌아갈 것을 청하면서 자신의 책에 <황제, 고향으로 돌아가다>라는 단락을 추가하겠다고 하였다. 도한 만주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하였던 퉁제후가 [[위안진카이]]로부터 시기가 무르익었으니 지체할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왔다고 전했고 역시 만주를 돌아보고 온 유양업도 이타가키 등을 만나 나진옥과 우에카도가 푸이를 기만한 것이 아니라고 전해왔다. 이쯤되자 푸이는 만주에 가고 싶어 안달이 되었다. 게다가 푸이가 일본 병영을 방문한 것을 두고 언론은 푸이가 만주행을 준비하고 있으며 이미 차를 타고 만주로 떠났다는 허위보도까지 떠돌고 있었다. 이에 푸이는 톈진 총영사관 측에 시기가 무르익지 않아 당장 봉천에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관동주]]에 잠시 머무르는 것이 톈진에 있는 것보다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뜻을 타진하였다. 이에 총영사인 쿠와시마(桑島)는 관동주도 갈 필요가 없으며 만철의 책임자인 우치다 야스야(內田康哉) 역시 푸이의 만주행에 대해 반대한다고 알리고 여전히 자신들이 푸이를 보호하겠다고 하면서 일을 신중하게 처리할 것을 요청했다. 다음날 부영사 고토가 다시 찾아와 쿠와시마가 가시이 중장을 찾아가 회담을 가졌는데 그 결과 가시이 역시 푸이의 만주행에 반대하기로 합의했다고 알렸다. 푸이는 당황하여 천진주둔군 통역관 요시다를 도로 불러 진위를 물었는다 요시다는 반대로 가시이가 즉시 푸이가 만주로 가길 원한다고 알리면서 푸이에게 자신의 뜻을 확고히 편지로 쓰라고 제안했다. 푸이는 시키는대로 편지를 썼는데 이번에는 쿠와시마 총영사가 그 편지가 진짜인지 등을 소란스럽게 물어왔다. 이쯤되자 푸이는 일본의 군부와 정계의 혼선에 대해서 몹시 짜증이 났고 마침 유양업으로부터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가 아직 만주가 완전히 일본군에게 장악되지 않았으나 우치다가 직접 푸이에게 만주로 갈 것을 청하기 전에는 톈진에 머무르길 원한다고 보고하자 푸이도 만주행을 잠시 포기하고 톈진에 눌러앉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