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진사변 (문단 편집) === 1차 천진사변 === 한편 11월 16일, 파리에서는 [[국제연맹]]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지난 10월 24일 제네바에서 열린 이사회는 11월 16일까지 일본군이 원 주둔지인 만철로 철퇴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바가 있지만 상임이사국인 일본의 깽판으로 부결되었다. 하지만 일본을 제외한 나머지 13개국이 모두 철군에 찬성하는 등 일본은 완연히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일본군의 진공이 계속되어 11월 19일, 치치하얼이 함락되고 [[마잔산]]이 일본군에게 투항하였다. 11월 24일, 일본군 총참모장 가나야는 국제여론을 고려하여 치치하얼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관동군은 이를 두고 가나야가 출세에 미쳐 육군의 신의와 국제대국이라는 구실로 포장하고 있다고 마구 비난하였다. 이 시점에 도이하라 겐지는 푸이를 탈출시키기 위해 11월 8일, 중국인들에게 돈을 주어 폭동을 사주하였다. 이날 푸이는 천진소보 기자 유염공의 방문을 맞아 그에게 자신이 만주로 떠났다는 소문은 유언비어라고 해명하는 인터뷰를 하고 그로부터 시국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었다. 한창 강의가 이어질 때 푸이의 시종 기계총이 뛰어들어와 폭탄이 배달되었다고 소리를 질러댔다. 이날 동북보안총사령부 고문이자 훗날 봉천시장에 임명되는 한간 조흔백의 명의로 과일상자가 선물로 들어왔는데 그 상자 안에서 2개의 폭탄이 나온 것이었다. 놀란 푸이는 일본 경찰을 불러 폭탄을 전달하였고 11월 9일, 요시다가 나타나 폭탄이 [[장쉐량]]의 병기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주장하며 푸이에게 빨리 만주로 떠나라고 재촉했다. 결국 푸이는 마음을 굳히고 정샤오쉬 부자와 한두명의 시종만 데리고 만주로 떠나기로 하였다. 이어 푸이에게 텐진을 떠나지 않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다는 협박 편지가 날아들었으며 푸이의 단골식당인 빅토리아 식당의 종업원이 기계충에게 전화하여 푸이를 암살하려는 자객들을 식당 근처에서 발견했으니 식당에 와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한가지 웃긴 것은 이 종업원이 그 자객들을 슬쩍 보고 이들이 장쉐량이 보낸 사람들이라는 것을 단숨에 간파(?)했다는 점이었다. 이날 톈진시 중국 군경기관에는 장벽, 이제춘 등 구 군벌의 불만분자가 [[톈진 조계#s-4|일본 조계지]]에 잠입하여 소란을 일으키려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톈진시장 장학명은 일본 영사관에 사람을 보내 불온분자의 구속과 인도를 요청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톈진 공안국은 오후 8시를 기해 계엄령을 선포하고 기병과 보병을 동원해 일본 조계지로 가는 길을 봉쇄하였다. 또한 톈진 교외의 군부대를 도시 안으로 진입시켜 경비를 맡게 했다. 밤 10시, 일본 조계지의 해광사에서 도이하라 겐지가 사주한 편의대 2천명이 집결했다. 밤 11시, 이중 100명이 경찰을 공격했고 이어 일본 조계지를 빠져나와 하북성정부, 톈진시정부와 텐진시 공안국을 공격했다. 이들은 수류탄과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거리에 마구 발포했다;. 공안국은 이를 진압하려 했지만 일본 조계지에 피해가 갈 까봐 손쉽게 제압할 수도 없었다. 이 소동으로 상당수의 중국인과 중국 군경이 살상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 보고받은 하북성 정부주석 왕수상은 각국 영사관에 이 사실에 대해 통보하는 한편 일본 조계지에 편의대를 단속해달라고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묵살했다. 11월 9일 새벽 4시, 가시이 사령관은 중국측에 자신들의 부하 수명이 유탄에 맞아 부상당한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오전 6시까지 중국 보안대를 일본 조계의 경계선으로부터 300야드 바깥으로 철수하라고 요구했고 불응하면 자유행동에 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왕수상은 일본 조계지에 편의대가 출입하고 있고 300야드 안에 중국군이 출동하지 않았으며 보안대와 경찰이 치안유지 뿐이라고 일단 거절했다. 허나 새벽 5시 반, 일본군이 재차 이를 요구해왔을때 편의대의 소동이 어느 정도 진압된 상황이라 치안유지가 가능하다고 판단한 왕수상은 이를 수락하였다. 하지만 이 조건이 수락되었음에도 일본군은 장갑차를 동원하여 시가지에 계속 포격을 퍼부었다. 일본 조계지는 중국 시가지에 30발의 폭탄을 발사했는데 이중 공안군 앞에 떨어진 폭탄에는 다이쇼 15년제라고 적혀 있는 등 일본군의 공격임이 명백했다. 또한 체포된 폭도들로부터 일본군 육군 38식 보병총과 심양 병공창에서 제작된 총기가 다수 노획되었고 이들이 1인당 40원의 수당을 일본으로부터 받았다고 자백하면서 일본 측의 개입이 명백해졌다. 일본 측은 사태를 중지하지 않고 일본 조계지 백화점인 중원공사에 전망대를 설치하여 편의대를 조직적으로 지휘하였으며 10일, 반일 대학생이 많던 [[난카이대학]]을 폭격하였다. 한편 진증수 등 유신들이 마지막으로 일본으로부터 확실히 약조를 받은 후에 가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충고했으나 푸이는 11월 10일 저녁, 몰래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기로 했다. 푸이는 시종 중 한 사람을 운전사로 삼은 후 기계충을 조수석에 앉힌 다음에 자신은 트렁크에 숨었다. 당시 계엄령이 선포되어 중국인 차는 통행이 불가능했지만 푸이의 집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시다가 조용히 뒤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 초병이 막을 때마다 요시다가 소리쳐서 물러나게 했다. 푸이는 부도 요리점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관으로부터 일본군복을 받아 변장한 후 일본 군용차에 탑승하여 [[톈진 조계#s-2|영국 조계지]]로 이동했다. 영국 조계지에서 푸이는 정샤오쉬 부자가 대기하고 있던 기선에 탑승하여 만주로 떠났다. 가시이 사령관과 협의가 되어 있던 쿠와시마는 각국 영사들의 푸이의 소재에 관한 문의에 "내사한 결과 이번달 6일부터 10일까지 사이에 자신의 거주지를 탈출하였다고 판명되지만 그 행선지는 물론 소재지도 명확하지 않다."라고 응수했다. 시데하라는 11월 14일, 지급전보를 보내 다음과 같은 공식발표를 하도록 명령했다. ||푸이씨는 만주사건이 발발한 이래 많은 협박에 시달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11월 6일 밤 어떤이가 과일선물 가운데 폭탄 2개(민국 16년제)를 넣어 보냈으며 <중국 공산당 천진지부 철혈단 본부> 명의로, 또는 익명으로 협박장을 보낸 자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8일 밤 현지 중국인 거리 쪽에서 폭동이 발생하자 점점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는데 최근 당지의 중국 신문에서 그의 탈출을 전해듣고 측근자를 취조한 결과 폭동이 일어나자 갑자기 은밀하게 탈출한 것으로 판명된다. 그러나 행선지에 대해서는 아직 당지에서 판명되고 있지 않다.|| 허나 국제 여론이 이를 납득하지 못하자 11월 20일, 시데하라는 앞선 발표의 일부를 정정하여 "푸이는 지난번 톈진에서 폭동이 발발하였을 때에 위해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10일 당지를 탈출한 듯하다. 그런데 13일 돌연 영구에 상륙하여 보호를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을 거부할 경우 실제로 동인의 신변에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다고 보증할 수 없는 사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인도상의 견지에서 이러한 요청을 받아들여 그를 안전한 곳에 수용하여 보호하게 되었다."라고 발표했다. 또한 1차 천진사변에 대해서는 <헤럴드 오브 아시아> 지를 통해서 톈진의 주민들이 친 장쉐량파와 반 장쉐량파로 나뉘었는데 그중에서 반 장쉐량파가 무장단체를 조직하여 치안당국을 공격하고 정치시위를 벌였으며 일본 측은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중국 보초들이 일본 조계지를 향해 마구 사격하여 응사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중국 측은 일본이 편의대와 건달을 고용하여 일으킨 조직적 폭동이며 일본제 총기를 압수했고 체포된 폭도들의 자백을 받았다고 밝혔다. 1차 천진사변은 11월 17일, 중국 보안대의 300야드 바깥으로의 철수를 규정한 협정을 체결하면서 일단락되었으나 일본 측은 협정을 전혀 준수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