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춘쉬안 (문단 편집) === 정미정조 === 위안스카이와 경친왕은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천춘쉬안을 내버려두었다간 큰일이 날 수 있다고 여겨 천춘쉬안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서태후가 그를 깊게 신임하니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베이징에서 몰아내기로 하고 공친왕 혁흔의 장녀 영수고륜 공주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천춘쉬안과 서태후 사이를 이간질시키게 했다.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받은 영수고륜 공주가 서태후에게 이렇게 간했다. >"천춘쉬안이 이야기하는 정치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려는 데 뜻이 있고 방법도 좋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매일 상소를 올리는데 춘추가 높으신 태후께서 어찌 그 수고를 감당하시겠습니까? 그에게는 변경을 맡겨 국방을 강화하게 하고, [[아이신기오로 이쾅|혁광]] 등에게 조용히 정사를 돌보게 하는 것이 태후마마가 조금이라도 편안해지실 수 있는 방법입니다." 이어 광동성 흠주에서 작은 변란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는 변란의 규모를 부풀려 보고했고 경친왕은 천춘쉬안을 양광총독으로 임명해 변란을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마침 영수고륜 공주의 참소도 있고 천춘쉬안의 끝없이 이어지는 상소에 지치기도 했던 서태후는 경친왕의 주장에 동의해 천춘쉬안을 양광총독에 임명했다. 군기대신 구홍기나 임소년은 대쪽같은 천춘쉬안이 베이징을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서태후의 뜻이 확고하여 어쩔 수 없었고 1907년 5월 28일, 천춘쉬안은 우전부 상서에서 해임되어 양광총독에 임명되었다. 천춘쉬안은 병을 이유로 휴가를 요청했고 서태후는 천춘쉬안을 위로하며 10일의 휴가를 주었다. 6월 12일, 천춘쉬안은 베이징을 떠나며 경친왕을 탄핵했고 서태후가 다시 경친왕의 파면을 고려하게 되자 구홍기가 이를 아내에게 누설했는데 경친왕 파면설이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서태후는 경친왕 파면을 번복하였고 구홍기가 고의적으로 기밀을 누설했다 여겨 미워하게 되었다. 6월 17일 구홍기의 측근 여조강이 파면되고 구홍기에게는 후임을 준비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으나 임소년이 다시 반대했다. 6월 19일 경친왕이 군기대신에서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으나 서태후는 반려했고 순친왕 재풍에게 경친왕을 보좌하게 했다. 이후 손가내와 철량이 구홍기 탄핵안에 근거가 없다는 조사 결과를 올렸으나 서태후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천춘쉬안을 제거하기 위해 서태후가 제일 미워하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를 이용하기로 하고 천춘쉬안이 유신파 단체인 보국회에 가입했으니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도당이라고 비난했다. 서태후는 이를 믿지 않았으나 높은 벼슬을 얻고 싶었던 채내황이란 자가 캉유웨이와 천춘쉬안이 같이 있는 것을 합성한 사진을 바쳐 바쳤다. 이때 천춘쉬안은 상하이에서 병을 치료하며 아직 양광총독에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8월 10일, 위안스카이의 뇌물을 받은 운육정이 천춘쉬안이 조정의 명을 받들지 않고 상하이에 머물며 캉유웨이, 량치차오와 결탁하여 일본의 세력을 빌어 조정을 전복하려 한다고 탄핵했다. 이에 서태후는 7월 4일 천춘쉬안을 파직했으니 이것이 바로 정미정조 사건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