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천하이분지계 (문단 편집) ==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주유(삼국지)|주유]]의 천하이분지계 == 〈감녕전〉에서 [[감녕]]이 [[손권]]에게 등용되고 나서 전략을 설파한다. 기회를 틈타 [[황조#s-2|황조]]를 격파한 이후 파촉까지 진군해 [[조조]]에 대항하자는 내용이다. 〈노숙전〉에서 노숙이 손권에게 등용되면서 손권에게 형주 점령책을 진언한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이걸 천하삼분지계로 보고, 노숙이 [[제갈량]]보다 먼저 삼분지계를 논했다고 보기도 한다.[* 단 노숙이 주인을 황제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일 뿐, 계책으로 보긴 조금 무리다. 구체적인 방안은 물론이거니와, 삼분의 주체도 없는 막연한 비전 제시였다.] 손권이 노숙을 초빙하였을 때 진언한 계책과, [[유표#s-1|유표]] 사망 이후에 이를 구체화하여 설파한 계책이 있다. 노숙의 계책은 제3의 세력(초기에는 유표, 유표가 죽은 후에는 [[유비]]로 전환)을 변수에 넣고 서로 협력하면서 조조의 군세를 분산시켰다가 나중에 기회를 봐서 북방에 변란이 생길 경우 장강([[양쯔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한 후에 중원을 도모한다는 계책이다. 다만 손권이 '''"[[손책|형]]이라면 모를까 나에게는 그런 장대한 계획을 실천할 만한 능력이 없다"'''라고 답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계점이 있었는데, 노숙의 두 번째 진언의 시점인 208년을 기준으로 잡아도, 노숙의 안엔 형주 세력인 [[유종(삼국지)|유종]]과 유비만이 있을 뿐이며 형주를 제외한 지역엔 별다른 고려가 없기 때문. 예를 들어, 제갈량의 계책엔 '[[유장(삼국지)|유장]]을 잡고(익주 평정), [[장로(삼국지)|장로]]를 잡고(한중 평정), 서융을 위무해([[마초]], [[한수(삼국지)|한수]] 등 관서 군벌) 어찌어찌 한다'와 같은, 당대에 건재하던 군벌들에 대한 대책이 있는데, 노숙의 계책은 이런 부분이 없다. 노숙의 구도는 손권 vs. 조조뿐이다. 유비를 손권의 말로 형주에 박아둔다한들, 나머지 드넓은 익주와 한중, 서량주의 군벌들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노숙이 진언한 계책은 당대에 존재하던 형주 군벌에 대한 전략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며[* 물론 그 전략의 궁극적인 목표는 손권의 천하통일이다. 형주 대책은 그 목표의 제1보.] 실제로 계책 내부의 대상도 시간 흐름에 따라 유표→유종→유비로 바뀌고 있다. 주유와 노숙의 전략은 입장이 좀 달랐다. 주유가 좀 더 강경파, 노숙은 온건파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노숙의 전략도 어디까지나 중요한 동맹 후보인 유비에 비해 손권의 세력이 우위에 있고, 상황 변화에 따라서 흡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는 세력 기반이 미약하던 유비에 비해 탄탄한 세력 기반을 갖춘 손권의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입장이라 봐야 할 것이다. 천하이분지계는 주유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주유전에 그 내용이 나온다. 주유도 [[형주]]를 점령해서 세력을 굳힌다는 이야기를 하며 주유는 잔챙이들 다 쓸어버리고 남북조 구도를 형성하는 천하이분지계에 가장 가까웠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손유]]와 주유가 군사를 이끌고 서천을 점령한 후 한중의 장로를 병합한다. 한중에는 손유가 머물며 마초와 동맹을 맺는다. 마지막으로 촉에서 돌아온 주유가 손권과 북상하여 양양을 친다. 그러나 이 전략 자체가 군사적인 공략을 말하고 있을 뿐 서촉을 점령한 후 행정적인 배려와 내정을 다진다는 구체적인 사항은 아니었고 더군다나 이를 말할 당시엔 유감스럽게도 주유는 남군공방전에 입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이미 깊은 병에 걸려 있었고 얼마 안 가 주유의 요절로 실행되지 못했다. [[적벽대전]]이 끝난 후 주유가 요절하고 그 후임으로 노숙이 임명되자 노숙은 자신의 계책을 설파하고 형주를 유비에게 일시적으로 양보하여 조조와 손권 세력권 사이에 완충 지대로 두었다. 우선 당시 유비와 동맹을 해서 강릉 일대를 손에 넣긴 했지만, 형주지방 관민들은 손권을 따르지 않았다고 노숙이 지적하고 따라서 그걸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이 요지였다. 한편 이 사이 유비는 [[유기(삼국지)#s-1|유기]]를 형주목으로 지목하고 사실상 형주의 인심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노숙은 유비를 방패로 활용하여 이 지역을 수비케하여 조조에게 맞서게 하자는 의견이었다. 당시 유비는 강하와 형남 4군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세력권이 없었고 남군공방전 직후 주유가 남군 일대 일부를 분할하여 유비에게 나누어준 정도였는데, 이 덕분에 유비는 강릉을 비롯한 다른 남군의 주요 지대에 대한 권리까지 양보받을 수 있었다. 이 권리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언제까지 이 권리가 유효한지 명시하지 않아 후일 분란의 씨앗이 된다. 노숙의 계책은 어디까지나 유비가 자신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수준에서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지만, 유비가 서촉을 점령하고 [[한중]]에서 조조와 현피를 뜨면서 사실상 오의 통제력을 벗어나 버렸기에 주유가 기획하고 노숙이 보완한 이 계획은 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익양대치]] 수준에서 형주를 분할하여 양측의 갈등은 잠시 봉합되는 듯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하던 친 유비 성향이던 노숙이 요절하면서 사실상 노숙의 전략은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