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령위 (문단 편집) == 역사 ==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 고려와 국경을 맞댄 명나라는 [[쌍성총관부]]와 [[공민왕]]이 수복한 그 이북 지역을 요구하는데, 원나라는 명나라가 합병했으니 옛 원나라의 땅도 명나라가 가지는게 맞다는 명분이었다. 실제로 반환된 [[동녕총관부]]나 [[탐라총관부]]와는 다르게 쌍성총관부는 끝까지 원나라의 직할지로 남아있다가 고려의 공격으로 탈환되었고, 그 이북 지역은 말할 필요도 없이 원나라 [[요양행성]]의 관할이었다. 결국 명나라는 1388년 3월에 요동도사를 시켜 공식적으로 철령위 설치를 시도한다. 지휘관 2명과 병사 1000여명이 [[강계]]를 거점으로 삼아 고려의 북방 경계에 진입했고, 이후 고려 영내에 주둔지 및 [[역참]]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사전작업에 들어가려한다. 철령위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으나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https://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kr_137r_0010_0030_0090|#]] 이미 수용하기 어렵다는 고려의 답서를 받았는데도 명나라는 사신을 보내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해버리는데 이에 격노한 [[최영]]이 군사를 보내 고려 영내로 진입한 명군 선발대 여럿을 죽이고 일부는 포로로 잡음으로써 양계의 방비를 관철한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명나라는 더이상 군사적으로 북방 영토에 간섭하려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http://db.history.go.kr/id/kj_033r_0010_0010_0030_0100|#]] [[주원장]]의 본의가 무엇이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지만 일단 고려땅에 철령위를 설치하려했던 계획 자체는 실패했다. 다만 철령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결과적으론 [[요동]]에 철령위가 세워지게 되었는데 처음에 봉집현이라는 곳에 치소가 위치했다가 현재의 [[랴오닝성]] [[톄링시]]로 치소가 이전되어 현재까지도 지명으로 정착했다. 때문에 톄링시에선 시의 지명이 [[강원도]]의 [[철령]]에서 유래했다고 밝히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