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종(송)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정실부인인 황후로는 [[소자성헌황후]] 맹씨와 [[소회황후]](昭懷皇后) 유씨(劉氏)가 있었다. 이 중 소자성헌황후와의 사이에서는 복경공주가 있었고, 두번째 황후인 소회황후 유씨(昭懷皇后 劉氏)와의 사이에서는 외아들인 [[헌민태자]] 조무가 있었지만 정실부인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아들 모두 요절했다. 그밖에도 다른 후궁들 사이에서도 딸 3명을 더 뒀는데 철종의 자녀 1남 4녀 중 아버지 철종보다 오래 생존한 자녀는 딸 2명 뿐이었다. [[소자성헌황후]] 맹씨는 철종보다 3살 연상으로, 17살이었을 때 선인성렬황후에게 간택되어 궁에 들어와 황후에 책봉되었지만, 자색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편 철종에게 황후로서 예와 대우는 받아도 사랑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선인성렬황후 사후 원우당인(구법파)들이 조정에서 밀려날 무렵, 맹 황후가 병에 걸린 외동딸 복경공주를 낫게 하기 위해 궁중의 금기사항이자 가법상으로도 금기사항이었던 부적을 쓰는 의식을 한 사건이 첩여 유씨의 모함으로 꼬투리 잡혀서 1099년 폐출되었다[* 이 의식은 철종이 허락을 했으나, 의식 이틀 뒤 복경공주가 죽자 맹 황후는 죽은 딸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불당을 만들고 기도를 올렸고 이는 전에 한 의식과 함께 문제가 되었다. 첩여 유씨가 이를 빌미로 철종에게 '황후가 요승을 불러 황제를 저주한다.'고 모함하자 철종이 불같이 화를 내며 직접 친국을 한 뒤, '황후가 법사를 부려 황제를 저주했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폐출시켰다.]. 맹 황후의 친정은 구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고, 첩여 유씨의 집안은 신법파와 끈이 닿아 있었기에, 맹 황후가 쫓겨난 것은 단순한 궁중 암투의 결과가 아니라 신법파에게 힘을 실어주고 구법파에게 타격을 주려는 철종의 의도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맹 황후는 철종의 명에 따라 요화궁이라고 불리는 몇 칸짜리 낡은 집에서 머물며 머리를 깎지 않은 비구니가 되었다가, 남편 철종이 1100년 죽고 시동생인 휘종이 즉위한 이후 1101년 다시 황후의 명예를 회복하고 복귀하게 된다. 그러나 나중에 또 폐출되었다. 그녀는 2번 폐출되고 2번 황실에 복귀한 것과 함께 그 유명한 [[정강의 변]] 사건으로 송나라 황실 사람들 중 [[송고종]]과 함께 유이하게 황실 사람 중 금나라로 압송될 때 끌려가지 않은 '''새옹지마''' 사례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건 [[소자성헌황후]] 문서 참조. 맹 황후가 쫓겨난 후, 헌민태자를 낳은 첩여 유씨는 황후가 되었다. 그녀가 바로 소회황후 유씨다. 소회황후는 철종보다 3살 연하였으며, 시와 글을 잘 쓰고 외모가 예뻐서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성격이 칼칼했다고 한다. 유씨는 철종이 죽고 휘종이 즉위한 이후 2번째로 맹황후를 내쫓았고 숭은태후로 추앙받았지만, 태후라는 신분을 이용해 정치에 백방으로 관여하려고 했다. 결국 유씨는 이때문에 휘종과 신하들의 불만을 사서 1113년에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