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퇴 (문단 편집) === 성직자들이 애용한 무기? === 하술되는 [[RPG]]의 영향으로 성직자들은 날이 달린 무기는 사용이 금지되어서 철퇴를 썼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 현실에서는 딱히 그런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부나 수도자들은 엄격한 수도 생활 동안 날붙이로 사람 죽이는 연습할 기회를 갖는다는 자체가 무리였겠지만, 중세 유럽의 주교와 성직자들은 수도자 생활하다 뽑힌 극소수의 평민 외에는 거의 장성하여 가산을 장남에게 양보하고 출가한 귀족가의 차남들이라 검술을 모를 리도 없었고 검의 사용을 피할 이유도 없었다. 더군다나 [[기사수도회]] 가입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사이면서 성직자였고, 오랜 전투로 심신이 상한 기사나 군인들이 몸을 의탁하기 위해 수도승으로 들어간 사례도 많다. 반대사례를 보면, [[샤를마뉴의 12기사]] 전설에서 랭스의 주교 튀르팽이 사용하는 무기도 검이었으며 심지어 교구 신부가 자기 관구의 교인과 여자를 놓고 검으로 결투를 해서 상대를 죽여버린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일로 성직자 일은 그만 뒀다. 또한 [[서양 검술]] 기록 중 가장 오래된 문서인 1280년대 I.33문서의 내용이 수도자 루테게루스가 검술을 가르치는 과정이라는 것을 보면 검 잘 다루고 검을 장비하고 적극적으로 운용하는 수도승들이 많았으면 많았지 금지되거나 없었다고 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나마 근거로 추측할 만한 것이라면, 둔기는 검에 비해서 저렴하고 요구 숙련도가 낮은 데다가 평시엔 지팡이로 쓰다가 위급 시 호신 무기로 쓸 수 있기에 순례자들이 잘 애용하던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정도. 다만 칼에 비해 덜 폭력적인 무기라는 인식엔 역사적 근거가 아주 없지는 않다. 먼저 [[1066년]]의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가한 바이외 주교 오도(1035?~1097)는 "피를 보기 싫어서" 철퇴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1214년]]의 [[부빈 전투]][* [[백년전쟁]] 이전까지 프랑스가 영국이 통치하던 [[아키텐]]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노르망디]] 포함)를 한방에 회복하게 된 전투다. 영국의 [[존 왕]]은 이 패배를 당한 후 귀족들에게 몰려 [[마그나 카르타]]를 서명하는 굴욕을 겪게 된다.]를 기록한 연대기 작가는 [[백병전]]에서 '[[에스터크|끝이 가느다란 신형 검]]으로 [[프랑스]] [[기사]]의 투구 눈구멍을 꿰뚫어 죽이는' [[영국]]-[[신성로마제국]]-[[플랑드르]] 연합군을 잔인하다고 비난하는 한편, [[필리프 2세]]의 사촌인 보베의 [[주교]] 필리프가 전열이 무너질 뻔한 위기 상황에서 '철퇴를 들고 여러 명의 영국인들의 투구 위를 내리쳐 바닥에 쓰러트린'것은 호신용이라 괜찮다(...)며 옹호했는데, 프랑스 입장에 편향된 서술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타격무기로 갑옷 외부에 충격을 가하는 전투법이 갑옷 틈새로 치명적인 급소를 집요하게 노리는 갑주 검술에 비해 덜 잔인해 '''보인다'''는 것은 당시 기준으로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보베 주교 필리프 드 드로이(Philippe de Dreux)는 1158년생으로, 부빈 전투 당시에는 56세였다. 3년 뒤에 사망한다.] 종합하면, 검으로 직접 상처를 내는 게 '''좋지 않아 보였다'''는 정도지 '''금지되었다'''라고는 할 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듯.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