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학사/동양 (문단 편집) === 브라흐마나 & 슈라마나 === 인도 문화권 철학은 크게 브라흐마나 계통과 슈라마나 계통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브라흐마나 계통의 철학은 브라만 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뜻을 밝히고 보존, 계승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슈라마나 계통의 철학은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은 브라만 교의 사제인 브라만 계급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카스트 제도]]의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특별히 엄선된 제자들에게 비의적으로 전수되었는데, 그들의 사상은 베다의 부록인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非 브라만 계급 출신의 자유 사상가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베다의 권위 및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도전적 태도를 취했으며, 각지를 떠돌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아지비카[* 불전에서는 사명파(邪命派), 사명외도(邪命外道)로 나와 있다.]의 선구자인 아지타 케샤캄발라, [[자이나교]]의 개조인 바르다마나(마하비라), 그리고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과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종교적, 탈세속적, 출세간적 경향을 나타냈고, 이러한 경향은 인도 철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가 입적한 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經), 율(律), 논(論) 삼장으로 결집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교단은 상좌부(테라바다)와 [[대중부 불교|대중부]]의 분열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분열을 겪게 된다. 이들 부파들은 제각각의 삼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로 기록된 상좌부 불교의 삼장(니카야)이다. 초창기 부파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출가자만이 [[열반]]이 가능하며, 평신도는 여러 차례 환생을 거치고 출가자가 되고 나서야 열반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출가 수행 문화에 익숙하던 인도인들에게는 이런 교리가 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새로 유입되던 유목민 및 [[인도-그리스 왕국]] 출신 그리스인들에게는 불교 진입에 큰 장벽이 되었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등 계율을 완화하고 평신도의 열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활발한 포교를 시작하였다. 불교 부파들 가운데 특히 사상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부파는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설일체유부]]로서, 이 부파의 논사들은 '발지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아비달마 구사론' 등 주요 논서를 저술했다. 이들은 대체로 '무아(無我)'를 인정하면서 법(法)의 고정 불변성, 실재성 또한 인정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교리의 배타성, 경직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팔리어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자면, 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상속한다. 따라서 이런 논쟁이 벌어질 이유도 없다. 법은 연기하면 상속한다. 이 점은 언제나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다만 역사적 상황에 따라 종파들이 강조하는 점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아래 서술한 용수 역시 법이 너무 강조되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무아, 공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에 2~3세기 경 [[나가르주나]](용수)는 당시 흥기한 대승불교의 흐름에 따라 자아는 물론 법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름으로써 가립된 것(名言所立)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절대적 공(空)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대승 불교의 이론적 바탕을 정립했다. 이후 [[바수반두]](세친)는 나가르주나의 절대적 공 사상을 발전시켜 마음 밖에 그 어떠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음이 유일한 실재라는 유식(唯識) 사상을 정립한다. 바수반두 이후 인도 불교는 니야야, 상키야, 미망사 등 브라만 교에 기초한 사상들의 도전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고, 디그나가(진나), 다르마키르티 등 탁월한 논사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밀교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인도 불교는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입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반면 불교와 경쟁하던 [[자이나교]]는 밀교화를 피하고 현재도 인도에서 살아남았다. 슈라마나 철학이 발전은 자이나교 존속에 국한되지 않고 이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시크교]]가 발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수피]] 철학과 교단 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다만, 후기 인도불교는 티베트로 계승되어 상당량의 논서와 전통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밀교적 성격을 가지면서, 교학적으로는 나가르주나 이후의 중관학 전통을 주로하고 있다. 이는 삼예의 종론의 영향인데, 중국 선승 마하연과 인도승 카말라실라(Kamalasila)간의 대론에서 카말라실라가 승리해[* 단, 중국측 문헌에서는 마하연이 서간으로 대론을 이어간 끝에 승리했다고 주장한다.] 중관학 전통이 지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 닝마빠 및 까규빠 등에서는 마하연의 주장에 일부나마 동의하는 의견을 표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족첸 수행법 등의 예가 있다.] 이후 티베트불교는 총카파 등에 의해 독자적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에는 서구권에 성공적으로 전파되었고 현대과학과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도 발견된다. 티베트 불교는 후기 인도불교의 계승자로서 현대불교학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