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학사/서양 (문단 편집) === 17-18세기 철학 === 서양의 [[중세]]는 적어도 문화적 측면에서는 이른바 [[인본주의]]의 부흥에 [[르네상스]]의 도래, [[종교 개혁]]에 따른 공고한 [[가톨릭]] 질서의 붕괴를 기점으로 [[근대]]에 접어든다고 보는 편이 일반적이다. 근대 철학이 탄생한 환경적 배경에는 (1) 르네상스와 문예부흥운동 (2) 과학혁명의 시작 (3) 인쇄술의 발전과 계몽사상의 대두 (4) 대항해시대와 신대륙의 발견 (5) 종교개혁과 자유로운 사상에 대한 관용[* 물론 이 시기가 정말로 자유로운 시기였던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가 이단으로 몰려 박해를 당한 것과, 그보다 훨씬 이후의 피히테나 헤겔조차도 무신론 논쟁에 휘말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자유롭다는 것은 최소한 중세보다는 사상적 다양성이 인정되었다는 것이다.] (6) 중세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감 확산 정도가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근대 철학의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르네 데카르트]]는 이전까지 쌓인 모든 지식, 심지어는 '내가 지금 컴퓨터/전자기기를 보고 있다', ''1+1=2'다' 같은 당연해 보이는 명제까지 모조리 [[회의주의|의심하고 철저히 무너뜨린 뒤]], '최초의 토대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인식론]]을 제시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근대 철학의 '인식론적 전회'로, [[존재론]]에 집중했던 기존의 철학에서 탈피하는 변화였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사실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고, 따라서 최초의 태도가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로부터 다양한 형이상학적/자연철학적 결론을 도출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데카르트의 철학은 여러 측면에서 당시 대학교의 주류 학설이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내용과 충돌하였고, 곧 유럽 여러 대학에서는 데카르트의 추종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데카르트로부터 출발한 이러한 학풍은 이후 [[합리주의]]라 불리게 되었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적 철학을 계승한 대표적 인물 중 하나는 [[바뤼흐 스피노자]]였으며, 특히 스피노자의 철학은 당시 [[유대교]] 및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이단적인 내용으로 흘러갔다는 점에서 당시 지성계 가운데 큰 스캔들이 되었다. 유명한 데카르트주의자 니콜라 말브랑슈는 데카르트의 철학적 방식을 계승하며 스피노자 철학의 문제점을 답습하지 않을 방식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는 합리주의적 전통을 계승하되 기존의 합리주의자들과는 매우 다른 독특하면서도 방대한 철학적 체계를 수립하여 이후 철학계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반면 합리주의와는 다른 방향에서 [[프랜시스 베이컨]]은 스콜라 철학에서 중시하는 [[논리학]]이 [[연역논증]]에만 치중하는 것을 비판하며, 실제 실험하고 관찰하는 경험을 중시하길 제언했다. 이는 곧 '직접 감각 혹은 지각한 경험적 내용만이 참된 지식의 토대가 된다'는 [[경험주의]] 원칙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영국]]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으며, [[존 로크]]에 의해 본격적인 철학적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로크의 뒤를 이은 [[조지 버클리]]는 로크가 제시한 바 경험주의 원칙을 더욱 일관적으로 적용할 경우, 감각 등이 속한 정신을 뛰어넘는 '물질'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는 [[관념론]]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데이비드 흄]]은 경험주의 원칙을 충실히 따를 경우, 실체, 자아, 그리고 인과 그리고 [[귀납논증]] 자체의 정당성까지 의심하는 게 마땅하다는 매우 영향력있는 [[회의론]] 철학을 개진하였다. 이러한 두 인식론 전통은 [[임마누엘 칸트]]에 의해 집대성된다.[* 사실 '합리주의', '경험주의'라는 축으로 데카르트부터의 철학적 흐름을 정리하는 관점을 제시한 것이 바로 칸트 본인이다.] 칸트는 '흄의 책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경험주의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동시에 [[미적분학]]이 당시 [[고전역학]]을 통해 거둔 성공을 보며 흄 철학이 갖는 [[회의주의]]적 귀결을 막아야 한다고 보았다. 칸트는 그 해법으로 『순수 이성 비판』에서 우리 바깥의 '사물 자체'에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지성(혹은 오성) 개념 등을 통해 객관적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인식론]]을 제시하였으며, 나아가 이런 틀에 기초하여 [[윤리학]] 및 [[미학]] 등 방대한 영역에 걸쳐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칸트는 더불어 [[계몽주의]]에 긍정적이었으며, 결국 말년에는 [[프랑스 혁명]]을 목도하게 된다. 이렇듯 [[프랑스 혁명]]을 이끌어 낸 동력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흔히 근대 초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중세 기독교적 정치 및 국가관에 도전하는 다른 관점을 제시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여겨지고는 한다. 이런 흐름 가운데 [[토머스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통해 정치 자체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제시함으로써 [[정치철학]]의 효시가 되었고, 특히 이때 제기된 [[사회계약론]]은 이후 [[존 로크]]와 [[장 자크 루소]]를 거치며 발전함으로써 이후 근대 [[민주주의]] 성립 및 현실 정치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중세 철학 등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초기 근대 철학은 결과적으로 [[앙시앵 레짐]]을 지탱하는 종교적/사상적 기틀을 논박하는데 성공했으며[* 다만 이런 결과가 근대 철학자들의 의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데카르트와 ([[이신론]]자라는 평가를 들을지언정) 라이프니츠는 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옹호하는 유신론자들이었으며, 버클리는 아예 [[성공회]] [[주교]]였다. 또한 홉스 역시 [[사회계약론]]을 가지고 [[절대왕정]]을 옹호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많은 철학사가 혹은 역사학자들은 이런 흐름이 결국 종교나 미신 대신 인간과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인본주의]] 및 [[자유사상]]의 발흥을 돕고, [[전제군주제]] 등 구시대의 유산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내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