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청나라 (문단 편집) == 경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worldgdp1790.png|width=100%]]}}} || 위는 [[1790년]] 당시 세계 [[GDP]] 비교 [[그래프]].[* [[https://youtu.be/xb5zYKYF3Xo|해당 영상]]] 당시 [[인도 제국]] 경제력의 두 배일 정도로 청나라의 경제력은 엄청났다.[* 청 건국 초기에는 전란으로 인해 피폐한 상황이라 잠시 [[무굴 제국]]에 밀려 2위였었다. 하지만 무굴 제국은 [[샤 자한]] 사후 실정을 거듭한 반면 청나라는 착실히 내실을 다져 역전하였다.] 전근대 중국의 경제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한다. 첫째는 지역 간 사치품, 필수품 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한 [[송나라]] 시대고, 두 번째는 1550년~1800년대의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다. 이 시기들을 거치며 '''교환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의 점진적인 전환'''이 이루어졌고,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권한을 강화해나갔다. 특히 청나라 때는 서양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상인들이 엄청난 부를 쌓고 권력을 거머쥐었다. 다만 [[1인당 GDP]]의 관점으로 보면, 개인이 가장 풍요롭게 살았던 때는 [[북송]] 시대다. 1340년 기준으로 26.5테일이었으나, 명나라 시기 들어 19테일로 줄어들었고 청나라 들어서는 14테일 수준에 이르렀다. [* 이는 인구 증가분을 고려하여 해석해야 된다. 북송 시기가 중국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던 것은 어느정도 사실이나, 북송의 경제력이 더 강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1840년 기준 청나라의 1인당 GDP를 당시 초강대국인 [[대영제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1인당 GDP는 영국의 14.95% 수준이었다. 물론, 중국의 물가가 영국보다 훨씬 저렴했다는 점은 고려되어야 한다. 경제적인 면에서 청나라는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17세기]] 말쯤이면 명청교체기에 발생한 경제적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됐다. 청 정부가 대대적인 농업 진흥책을 실시한 영향으로 경작지가 늘었고, 인구는 명 말기에 비해 거의 2배 수준인 3억 명으로 증가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땅콩, 고구마 등이 유입됐고, 해금령을 통해 무역을 차단했던 명나라에 비해 해외교역량도 증가했다. 다만, 교역에 있어서는 '광동 체제'라는 시스템에 입각해 오직 [[광저우]]에서만 해외교류가 허가됐다. 광저우에서도 조정의 허락을 받은 공행들만이 서양 상인들과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강희제]] 시기에는 [[황하]]를 치수하고 [[대운하]]를 건설했다. 이 대운하를 이용해 남쪽에서부터 북부의 [[베이징]]으로 밀, 소금, 비단 등의 필수품과 사치품들을 운송해와 필요를 채울 수 있었고, 그러한 거래를 통해 남부의 상인들은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청 조정은 세금을 주로 밀이나 은의 형태로 거두었으며, 이 때문에 운하를 운행하는 선박들은 운송품과 함께 조정에 바칠 세금도 함께 실어날랐다. 이 과정에서 거두는 세입도 엄청났다.] 황제들이 직접 [[치수]]와 경제를 책임지고 떠맡은 덕택에 청조 때는 중국 전역에서 '''상품작물 재배'''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단순한 자급자족을 넘어 '''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농사짓는''' 경우가 많아졌다. 시장들의 활성화는 '''중소형 도시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중국의 도시들 중에는 그 역사가 청나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청나라는 광산 산업의 사유화도 장려했다. 명나라 시기에 광산 사업가들은 사업으로 얻은 이익의 15분의 1을 나라에 바쳤고, 그 외에도 상당수의 이익이 보호비나 뇌물 등의 형태로 관료들의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래서 개인 사업가들은 광산 산업을 기피했고, 나라가 광산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해 생산력이 낮아졌다. 그러나 청조는 광산업에서 손을 뗐고, 무기나 동전 따위를 주조하는 데에 필요한 철, 금, 은 같은 금속들을 대부분 시장에서 사들이는 방안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광산업은 폭발적으로 발전했다. 특히 [[광둥성]]을 중심으로 광산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전세계에서, 특히 유럽 지역의 상인들이 중국으로 몰려들어 비단, 차, 도자기 등의 고급 상품들을 사가면서 중국에는 은이 쏟아졌다. [[스페인 제국]]이 아메리카 광산에서 채굴한 은의 20~30%가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는 통계 자료가 있을 정도다.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웠던 [[강남(중국)|강남]] 지방에서는 [[멕시코]]에서 흘러들어온 은을 이용한 무역이 가능했다. [[옹정제]] 시기에는 유입된 은을 이용해 [[은본위제]]를 본격적으로 실시하기도 했다. [* 은본위제가 본격적으로 작동하려면 기본적으로 은이 충분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실시하기 어렵다. [[조선]]만 해도 19세기까지 은본위제는커녕 물물교환을 벗어나기조차 녹록찮았다.] 이같은 조세 제도는 곧잘 유지되다가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의 침탈이 본격화되어 은의 유출이 심각해지며 무너졌다. 그에 따른 사회 불안정이 청나라의 멸망을 촉진한 한 이유였다. 청 중반기에 들어서부터는 초기 형태의 은행이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장거리 무역이 발전하면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상인들의 수가 늘었다. 이 상인들은 무거운 금과 은 따위를 계속 가지고 다니기가 힘드니 돈을 모아 상단을 설립했고, 출발 전에 미리 은을 맡겨놓고 차용증을 받은 후 목적지에 도착한 뒤 해당 상단 지점을 찾아가 증서를 보여주고 은을 받았다. 18세기 즈음에는 이런 식의 '''은행 네트워크'''가 전국적으로 확대됐고, 자본의 유동성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 대륙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 정부는 늘 재정난에 시달렸다. 이는 서구 열강들과의 불평등조약에 따른 막대한 배상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낙후된 행정과 부정부패가 원인이었다. 토지세인 전세만 하더라도 청 멸망 직전 시기를 기준으로 3,500만냥이었는데, 10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었다. 조세제도가 100년 동안의 경제상황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더군다나 많은 토지는 토지 대장에서 누락되거나 실제와 맞지 않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국의 토지와 수확량을 체계적으로 정확히 조사해야 했다. 그렇지만 영토가 워낙 광대해 조사사업을 실시했다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서 실행되지 못했다. 만성적인 부패로 세리들과 고위관리들이 착복하는 세금도 엄청났다. 무작정 세금을 인상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농민의 반발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결국 말기 청나라의 재정 시스템은 멸망할 때까지 개혁되지 못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1873년 7월부터 지조개정법을 실시해 해마다 모든 토지에서 토지가격의 3%에 해당하는 세금을 걷어 근대화와 군비에 쓰일 재정을 마련했다.[* 다만 일본의 근대화는 1895년 청나라와의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2억 냥의 배상금을 받아내면서 본격적으로 성사되었다. 이때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받아낸 배상금 2억 냥은 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에 해당되는 거액이었다. 그나마 이 액수도 원래는 3억 냥이었는데, 당시 청나라측 협상 대표인 [[이홍장]]이 일본인한테 습격을 당해 눈에 부상을 입은 사고를 입어서 일본 측이 2억 냥으로 줄여준 것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일본보다 재정 근대화가 뒤쳐진 것은 여러모로 아쉬운 일이었다.[* 출처 : 권성욱 저 <중국 군벌 전쟁> 1부 4장.]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