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나라/문화 (문단 편집) === 의복 === ||[[파일:29c4acb9b1a34b829c11d3028f8ecfd1.jpg|height=3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sen.jpg|height=300]]||[[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3px-Empress_XiaoXian.png|height=300]]||[[파일:CixiPortrait.jpg|height=300]]|| ||[[건륭제]]의 초상화||[[니오후루 허션]]의 초상화||[[효현순황후]]의 초상화||[[서태후]]의 초상화|| 청 대의 의복은 만주족의 전통의상인 [[치파오]]이다. 물론 한족의 전통 의상인 [[한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기는 하였으나, 청 황실이 만주족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만한차별을 엄격히 하면서 아무래도 한족의 영향보다는 만주족의 의복과 더 닮아있다. 만주족의 기본 의상인 치파오는 기본적으로 원피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특히 여성의 경우에는 허리 아래쪽에 옆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족의 한푸는 기본적으로 하늘하늘하고 소매가 넓으며 품이 커서 여유가 있는 것이 특징이라면, 치파오는 상대적으로 더 몸에 딱 붙어 굴곡을 강조하고 몸매를 더 잘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특히 현대의 치파오는 1910~20년대 서양식 의복의 전래에 따라 근대적으로 개량된 것으로,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등장한 것이기에 청나라 대의 보편적인 의복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청나라는 입관 이후 한족 이후 원나라의 선례를 밟지 않기 위하여 피지배계급이었던 한족의 의복 문화를 근절하고 만주족의 전통 복식을 한족에게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는 당연히 중화 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한족에게는 엄청난 반발을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청나라 조정도 할 수 없이 타협,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 원칙을 내세워 남성의 경우에는 무조건적으로 만주족의 복식을 답습하되, 여성과 도사, 승려 등의 경우에는 일부 한족의 복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만 청나라가 오래 이어지며 만주족의 통치가 당연시되기 시작하자, 점차 여성의 복식 역시 만주족의 복식을 자연스레 닮아가기 시작하였으며 청 말에는 명나라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였다. 청나라 일반 남성의 경우, 장삼이나 장포(長袍)를 기본적으로 걸친 후, 그 위에 조끼 형태의 [[마과]]나 마갑 등을 덧대어 입는 경우가 흔했다. 참고로 장삼은 긴 원피스 형태의 남성용 치파오와 비슷한 옷으로, 옆트임이 존재한다. 또한 마과나 마갑의 경우, 본디 만주족들이 말을 탈 때 보온용으로 위에 걸치던 조끼 형태의 단상의였는데, 청 초기에는 만주족의 특권으로 여겨져 함부로 입을 수 없었으나 옹정제 연간에 한족 일반 백성들도 입는 것이 허가되었다.[* 한편 중국 청나라 대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것이 이 마과인데, 이 마과도 아무나 입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특히 황제의 색이던 황색마과의 경우, 황제의 친위대나 황제가 친히 하사한 사람만이 입을 수 있었던 것으로, 일반인이 입었을 경우 곧바로 끌려가 경을 쳤다.] 한편 청나라 여성이 입었던 것이 그 유명한 [[치파오]]인데, 양옆에만 트임을 주며 허리를 매지 않는 형태였다. 소매끝과 옷깃, 밑단 등에 다양한 색의 천을 달아 포인트를 주었으며, 특히 목선의 경우 둥근 형태가 기본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깃이 올라가는 형태를 띠며 점점 화려해졌다. 또한 그 위에 비갑이나 피풍이라고 하여 소매가 없는 조끼 비슷한 방한용 겉옷을 두르기도 하였으며, 보통 신분이 높을수록 이 비갑과 피풍의 무늬가 화려한 경향이 있었다. ||[[파일:chinesepeople1860s.jpg]]|| ||1860년대 청나라 광동성의 현령(縣令) 부부를 찍은 사진|| 위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청나라 시대 여성들의 독특한 머리 모양은 '양파두'라고 부른다. 정수리에서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가른 다음, 편방이라는 비녀에 감아 만든 것이다. 모양을 보면 알겠지만 시간과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머리 모양이라서 평민들보다는 귀족층이나 돈많은 세가들의 여인들이 주로 하던 머리 스타일이었다. 한편 남성의 경우, 남성이 쓰고 있는 모자는 '양모'라고 부르며, 말꼬리털 등을 붉은색으로 염색한 실을 등나무처럼 가벼운 재질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에 늘어뜨린 것이다. 입고있는 의복은 '조복'이라고 부르며, 현대에서의 군대 예복 정도의 위치에 있으며 종묘제례, 즉위식, 조회 등 중대사에서만 간간히 입고 나오는 의식용 복장이었다. 또한 남성이 어깨에 두르고 있는 저 독특한 모양의 장식도 청나라 시대 인물들이 굉장히 많이 입고 다니던 것인데, 이를 '피령'이라고 부르며, 길복이나 조복 등 공식적인 행사에서만 걸치고 다니는 일종의 예식용 칼라 정도로 보면 된다. [* 청나라 황제의 초상화를 보면 하나같이 저 피령을 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성이 매고 있는 목걸이의 경우, '조주'라고 따로 구분해서 부르며 108개의 구슬로 이루어져 있다. 구슬들 사이사이에 '불두'라고 하여 좀더 크고 재질이 다른 구슬들을 정확히 4개를 끼우며, 이는 1년의 사계절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조주의 뒤에는 탑모양의 장식과 구슬들을 꿰어만든 기다란 끈을 늘어뜨렸는데, 이를 '배추'라고 불렀다. 신분과 관직에 따라 조주의 품질 역시 달라졌으며, 만인지상의 황제의 경우에는 상아로 만든 조주에 황금을 장식하여 사용했다고도 한다. 또한 현대까지도 중국의 오랜 악습으로 남아있는 [[전족]]의 경우, 만주족의 전통이 아니라 명나라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한족의 전통양식이다. 강희제는 오히려 이 전족이 여성의 노동력을 하락시켜 국가에 손해를 끼친다고 생각하여 전족을 금할 정도였으나, 이 명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만주족 가문들이 이 풍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근대 시기까지 전해져 왔던 것이다. 흔히 '중국 모자'라고 하면 떠올리는 사발 모양의 모자는 청나라의 관모(官帽)인데, 명나라의 [[사모]], 복두 등과는 그 형태가 확연히 달라 '청대관모(清代官帽)라고 따로 부른다. 겨울에는 벨벳으로 안을 덧댔고, 여름에는 등나무나 비슷한 가벼운 재질로 만들어 사용했다. 모자 위에 있는 단추나 꼭지 부분은 공식적인 석상이거나 예식 상에서만 달았고, 사적인 자리거나 일상에서는 떼고 모자만 썼다. 특히 고위 관료들은 모자 위에 공작새 깃털이나 붉은 술 장식도 달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으로 그 시대에는 나름대로 대단한 명예였다. 모자의 꼭지 부분의 색깔과 장식은 계급에 따라 달라졌다. 고위급 관료들은 흔히 [[진주]]를 즐겨썼고, 1품 관리들은 [[루비]] 등 붉은색 투명 홍옥을, 2품은 [[산호]] 등 불투명한 붉은 홍옥을, 3품은 [[사파이어]] 등 투명한 푸른 옥을, 4품은 불투명한 푸른 옥을, 5품은 [[수정]]같은 투명한 백색 보석을, 6품은 진주 등 보석을, 7품부터 9품까지는 종종 황금이나 자줏빛 보석을 즐겨 사용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