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동검 (문단 편집) === 한국 === [youtube(XoFnh2Mub2w)] 한국에서 출토되는 청동검은 다른 지역의 것에 비해 [[아연]] 함유량이 높다고 한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청동검을 만들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주로 발견되는 청동검은 초기 [[청동기 시대]] 때 만들어진 [[비파형 동검]][* 한창균 "예를 들어 조양시 용성구 열전창 유적에서 교정연대가 기원전 2015년~기원전 1475년, 기원전 1990년~기원전 1760년, 기원전 2030년~기원전 1830년, 기원전 2265년~기원전 1965년으로 나왔고, 북표현 풍하 유적에서 기원전 2020년~기원전 1760년, 건평 수천 유적에서 기원전 2290년~기원전 2070년으로 나왔다. 한편 내몽골자치구 오한기 대전자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는 기원전 1870년~기원전 1600년, 기원전 1830년~기원전 1560년으로 교정연대값이 나왔는데, 이 유적에서는 작은 종류의 청동유물이 발굴된 바가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처럼, 적봉 지주산 하가점 하층문화기의 교정연대값이 기원전 2550년~기원전 2270년으로 나온 바가 있었는데, 현재 이 측정값은 하가점 하층문화기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것이다."]과, 후기 청동기시대부터 [[철기 시대]] 초기까지 만들어진 세형 동검[* 한반도 지역에서 주로 출토되기 때문에 한국식 동검이라고도 불리고 있었다.]으로 나뉘어진다. 비파형 동검은 날이 갈리지 않았기 때문에 주로 의식용 도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오래된 것일수록 더욱더 반짝거리는데, 대부분 유리같은 모습을 보고 초보자들이 가품으로 생각해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세형 동검 역시 전투용보다 의식용 도구로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학설이 있었는데, 그 근거는 한국 세형 동검의 경우 칼날과 손잡이 연결부가 약한 구조로 되어 있어 전투에서 몇번 휘두르다 보면 손잡이가 부러질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밝혀진 바로는 세형 동검은 무기로도 사용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일부 동검에는 혈흔이 묻어있어 무기로 사용한 흔적이 있으며, 세형 동검과 함께 출토되는 청동모 및 화살촉 역시 무기로 사용되었다. 이들 청동 무기가 보편화된 시절은 초기 철기 시대로, 다른 철기와 혼용되었다.[* 물론 의식용 도구로도 사용됐을 것이다.] 다만 한반도에서 청동제 농기구는 사용되지 않았다. 한반도는 청동의 주재료인 [[구리(원소)|구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구리는 일본에서 수입하여 충당했고 그래도 부족하면 사찰의 종을 몰수해 녹여 구리를 회수하곤 했다. 청동이 귀한 금속이다보니 전 세계적으로도 청동제 농기구는 그리 많지 않다. 철기시대 초창기의 철제 무기는 청동 무기보다 질이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철기시대로 이행한 이유는 구리와 주석에 비해 철은 너무나도 흔했기 때문. 일례로 주석이 나오지도 않고 무역을 통해 수급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몇몇 문명권에서는 구리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바로 철기시대로 건너뛰기도 했다. [[동기 시대]](금석병용기)에서 [[청동기 시대]] 후기까지도 여전히 석기가 무기로 더 많이 쓰였고, 일상용품도 대부분 석기와 목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