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어 (문단 편집) ==== 유럽 ==== [[파일:bloaters.jpg]] ▲ 영국의 염장 훈제 청어인 블로터(Bloater). [youtube(Doy4knWLCIA)] ▲ [[바이킹]]들의 식사를 소개하는 영상. 청어포가 나온다. ~~얼마나 단단하면 먹기 전에 막대기로 두들긴다~~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밀]]과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https://seafoodfromnorway.co.kr/seafood-from-norway/herring/|#]]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 출처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어류)|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 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스코네는 덴마크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 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와 [[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때문에 발트 해의 청어 어업은 현대까지 이어지지만, 다시는 이때의 위상을 복구하지 못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83px-Willem_Beuckel_lithograph_1821.jpg|width=100%]] ▲ 자신이 발명한 칼과 청어를 든 빌럼 뵈컬손 [[파일:468192001.jpg]] ▲ 네덜란드 청어 어업의 핵심이던 청어잡이 [[원양어선]] 하링부이스(Haringbuis). 출처: 대영박물관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image/468192001|#]]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간]][* 간의 효소가 염장된 청어에 [[발효]] 과정을 일으켜 풍미를 이끌어낸다.]과 [[이리(어류)|이리]][* 청어의 이리는 진미로 인정받는 고급 부위다.]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소금물|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날려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함수)을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함수는 그저 바닷물을 끓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https://books.google.co.kr/books?id=UtgNCAAAQBAJ&pg=PA300&lpg=PA300&dq=amsterdam+city+on+herring+bones&source=bl&ots=ugLPROHsHZ&sig=XJoYKzZkpa2xXq1S54FgkqqPYL8&hl=en&sa=X&redir_esc=y#v=onepage&q=amsterdam%20city%20on%20herring%20bones&f=false|#]]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youtube(bhbtSHfbLYs)]|| ||[youtube(qeYZ9b-0mdo)]|| || 1920년 스코틀랜드의 스카보로 항구와 1925년 잉글랜드 그레이트야머스 항구에서 스카치 큐어 방식으로 청어를 손질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 스코틀랜드에서 온 피셔 걸(Fisher Girls)들이 청어의 내장을 작은 칼로 제거하고 나무 드럼통에 담는 모습이 담겼다. 영국 그레이트야머스의 [[https://www.museums.norfolk.gov.uk/time-tide|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청어잡이 철마다 스코틀랜드 선단과 함께 영국 동부 연안의 각 항구에 몰려들어 청어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그들은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들은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청어잡이 항구이던 잉글랜드 [[노퍽주]]의 그레이트야머스에 특히 많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청어 어업이 쇠퇴하고 그레이트야머스가 관광도시로 변화하면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지역들은 낮은 수온과 함께 영양 염류가 풍부한데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에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 앞바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그레이트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파일:06-5-1024x573-1.jpg|width=500]] ▲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어선이 몰려들었고, 유망 또는 [[저인망]]을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이 지역의 청어는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야머스 항의 수많은 트롤어선들은 세계대전 당시에 징발되어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함]]으로 쓰이기도 했다. 유럽의 주요 청어 가공품들은 다음과 같다. * '''청어포''' 청어를 말린 것으로, 우리나라의 [[과메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춥고 습한 기후와 청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인해 청어가 잘 마르질 않아, 나중에는 다른 방식들이 대세가 되었다. * '''청어 피클(Pickled herring)''' [[독일]]의 롤몹스, [[포메른]] 지방의 비스마르크와 [[네덜란드]]의 홀란처 니우어(일명 하링) 등, 식초나 소금에 절여 만든 청어 가공품 전반. 독일의 롤몹스와 비스마르크는 청어 필레와 썰어놓은 양파를 후추와 겨자씨를 비롯한 향신료, 조금의 소금과 오이 또는 당근과 함께 화이트와인 [[식초]]에 절여서 만든다. 네덜란드의 하링도 비슷하지만 소금물을 쓰기도 하며, 어린 청어를 사용해 크기가작은 것이 특징이다. 그 외 과거 한자동맹에 청어 가공품을 내다 파는 어시장이었던 [[스웨덴]]의 [[스코네]] 지방에서도 여전히 생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트니아 만의 묽은 바닷물로 인해 발효가 된 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수르스트뢰밍]]이다.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스카치 큐어(Scotch Cure)라고 하는 방식이 유명하다. 1860년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당대 세계 최대 청어 어장인 그레이트야머스에 도입되었다. 위 영상에서처럼, 청어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내장을 바로 제거한 뒤 나무통에 굵은소금과 함께 빼곡하게 담는다. 그러면 소금이 청어에서 흘러나온 물에 녹아 섞이면서 함수가 되어 청어를 절이게 된다. 이 방식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에 수출되는 물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에서는 하술할 블로터와 키퍼의 명성이 더 높았다. * '''Buckling(버클링)''' 훈제 청어. 그 중에서도 열훈법으로 바싹 훈연한 청어를 의미한다. 과거 [[발트]] 지역에서 기원했는데 강한 불을 피워 빠르게 청어를 보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술할 영국의 레드 헤링과 다른 점은 강한 열에 빠르게 훈연한다는 것이다. 발트 3국 말고도 독일에서도 즐겨 먹었다. 덴마크 보른홀름 지역에서도 즐겨 먹으며, 여기서는 생선의 내장을 따고 잠시 절였다가 바싹 훈연하는 식으로 만든다. * '''Bloater(블로터)''' 1836년, 영국 [[노퍽주]] 그레이트야머스의 비숍이라는 염장업자가 개발한 방식. 야머스 블로터(Yarmouth Bloater)로도 불린다. 어원은 '담그다' 라는 뜻의 [[스웨덴어]] blöta. 청어들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함수 수조에 넣어 일주일 간 절인다. 이후 20마리씩 눈을 막대기에 꿰어 탑 형태의 훈연실 천장과 벽에 빼곡히 걸고 6시간에서 8시간 가량 잠깐 냉훈법으로 훈연하면 완성된다. 주로 생산되던 시기는 8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동앵글리아]] 지역의 청어가 기름기가 적어 적합했다고 하며, 주로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한때는 청어 가공품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통과메기와 비슷한 이유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드 헤링에서 블로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제품은 따로 실버 헤링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더 오랫동안 절이고 더 짧게 훈연했기 때문에 차라리 날생선에 가깝다. * '''Red Herring(레드 헤링)''' 영국의 [[훈제 청어]]. 염장법이 개발된 16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청어 가공품. 가장 이른 기록이 13세기일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이다. 청어를 적갈색이 될 때까지 몇 주간 바싹 훈연한 것이다. 덜 훈연한 것은 은은한 황금색을 띄어 골든 헤링이라 하는데 이건 현재도 영국에서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이다. 한편 몇 달간 훈연해서 시꺼멓게 변한 청어는 블랙 헤링이라 부르며, 끝내주게 좋은 보존성을 자랑했다. 이건 주로 [[카리브]] 및 [[아프리카]] 식민지에 [[노예]]들의 식량으로 수출하는 상품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현재는 생산되지 않는다. 냄새가 매우 심해서, 근세 범죄소설에서는 범인이 이걸 마치 현대 전투기가 [[플레어(무기)|미사일 회피용 플레어]]를 뿌리듯 자신을 뒤쫓는 [[경찰견]]들에게 던져서 후각을 교란하는 묘사를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영어에서 레드 헤링이라 하면 [[논점일탈의 오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youtube(cwmUWOoQ5LI)]|| || 브리티시 파테에 소개된 키퍼 제작 방법. 1948년, 그레이트야머스에서 촬영. || * '''Kipper(키퍼)''' 영국의 [[훈제 청어]]. 내장을 제거한 청어를 세로로 반으로 갈라 편 다음 소금을 뿌려 몇 시간가량 염장한 후, 막대기에 스무 마리씩 눈을 꿰어 훈연탑에 건 뒤 훈제한 것. 영국에서 현재도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해산물 식단이다. 그레이트야머스의 염장업자 존 우저(John Woodger)가 1846년에 개발했다. 우리나라 [[과메기]]와 거의 같다. 1918년부터는 천연색소를 첨가했는데, 참나무 연기의 검은색을 내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으로는 훈연하면서 청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싹 훈연하면 위의 레드 헤링이 된다. 최대 생산지는 [[맨 섬]]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