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정부와 반란군이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라"라고 요구했으나 6월 8일에는 청군의 아산 상륙, 다음날인 6월 9일에는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450여명을 시작으로[* 제9 혼성여단장은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으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 6월 13일과 6월 17일 혼성 제9여단 후발대 수천 등 7월 10일까지 8,000여명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격하여 [[용산구|용산]]에 본영을 두고 서울 시내를 진군하였다.[* 이 서울 시내 진군은 경복궁 점령을 준비한 예행 훈련이었다.] 그리고 일본은 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공격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들과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어서 한 때는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 "경복궁 점령 사변"과 같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었다. [[민영환]]은 1900년에 세운 장충단비에 ''''갑오사변''''(甲午事變)이라 하였고,[[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B6%A9%EB%8B%A8%EB%B9%84|#]] 1983년 김경창은 '甲午倭亂 : 甲午,こ未,こ巳,경성의 궁중왜란'이란 책에서 ''''갑오왜란''''(甲午倭亂)을 [[https://library.yonsei.ac.kr/search/detail/CATTOT000000999405?mainLink=/search/tot&briefLink=/search/tot/result?folder_id=null_A_lmtsn=000000000006_A_q=%E7%94%B2%E5%8D%88%E5%80%AD%E4%BA%82_A_lmtst=OR_A_lmt0=TOTAL_A_st=FRNT_A_si=TOTAL|#]] 1988년 김상기는 〈甲午義兵의 歷史的 展開와 性格〉이란 논문에서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 칭하였다.[[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kn_036_0030&fileName=kn_036_0030.pdf|#]] 황태연은 2017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갑오왜란''''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운동도 포함한 항일운동이라 저술하였다.[[http://www.yes24.com/Product/Goods/35081339|#]] 중앙일보는 2017년 기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갑오왜란''''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21839161|#]] ]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터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 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000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7월 23일 0시30분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을 공격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경복궁 영추문|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 정문인 광화문에서 진입이 시도되었다면 경복궁의 배치도 상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침전의 왕이 도망갈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같은 시간 반대편인 [[경복궁 건춘문|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사이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폭파시키면서 궐내로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 애초에 일본 쪽 기록에서 조선군을 '''그냥 쫓아냈다고''' 기록된 문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측에서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거짓 기록한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였을 가능성이 높다.] 허나,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질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https://www.google.co.kr/amp/s/mnews.joins.com/amparticle/3695868|#]]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했다.[* 일부 무기는 조선군이 무장해제 당하기 전 자기 손으로 파괴하고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군 무기는 연못에 던져버려 고장나게 만든다. 시위대는 이 총기를 건져다가 다시 무장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해 을미사변 때 또 경복궁에 처들어온 일본군과 전투할 때 궁궐을 호위하던 상당수의 시위대의 무기가 격발이 안되는 등 전투력 저하의 원인이 된다.]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의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에서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개혁을 하라고 요구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했었다. 이는 나중에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나온 조선의 독립국 문제에 대한 명시에서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독립을 한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협회|독립 협회]]를 비롯한 많은 수의 조선 지식인들이 이 말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리고 8월 26일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또한 일본은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이 풍도 앞바다의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1894년 일본의 외무 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과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000명을 [[평양부]]에 마옥곤의 의군 2,000명을 [[의주부]]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 - 청 비밀 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쯔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았다.[* 영국의 식민지 영향권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