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평양성 전투 ==== || [[파일:external/img.bemil.chosun.com/20140317195658.jpg|width=100%]] || [[파일:Korean_soldiers_and_Chinese_captives_in_First_Sino-Japanese_War.png|width=100%]] || ||<-2> 청일전쟁 당시 [[평양부]]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조선군]]과 청군 포로들을 찍은 것이다. 뒤쪽에 [[일본군]]도 보인다. 조선군은 장위영 소속의 병사들이다.] || || [[파일:평양객사 대동관(일본군에게 점령당시).png|width=100%]] || [[파일:평양선화당(노즈 미치쓰라중장 평양점령당시).png|width=100%]] || ||<:>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행궁|평양객사]]의 모습. ||<:> 노즈 미치쓰라 중장과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평안감영과 선화당 ||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장위영을 수색대로 삼아 [[평양부]] 일대에서 벌어지던 전투에 동원하였고, 그 당시 평안감사는 "청군과 연합해 싸우라"는 [[흥선대원군]]의 밀명을 받고 청군의 편에서 싸웠다. 9월 15일 새벽 일본군 17,000명은 [[평양부]]의 중심지역인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 14,000명을 공격했다.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고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으며,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당황하였다. [[이홍장]]은 자신의 기반인 군사력을 잃을까봐 군대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사전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청의 장수 좌보귀가 패사하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섭지초는 일본군에 항복 제의를 하면서 도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일본군도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해 잠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하려고 했으나 소극적인 청군의 태도에 끝까지 밀어붙였고, 24시간의 일방적인 교전 끝에 청군은 [[을밀대]]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이 [[평양성]]에 입성한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8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군은 2,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2,000명은 [[압록강]]변으로 퇴각하였다. 청군 포로들은 일본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는 등 가혹한 처분이 이어졌다. 일본이 급하게 들이친 것에 비해 청군은 생각 이상으로 방비를 충실히 해놓았고, 그 결과 초반에 일본은 지휘관도 부상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보고 탄약과 식량도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청군은 지휘 체계의 혼란 속에서 끝까지 우위를 지켜내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홍장 라인으로서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섭지초가 북쪽 방면에서의 일본군의 침투를 보고 너무나도 쉽게 백기를 내걺으로써 급속하게 붕괴된다. 2,000여 명에 이르는 청군 희생자는 대부분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발생하였다. 서울 인천과 경기 충청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등 조선 전역에서 양군의 민간인 징발과 약탈로 피해를 입었고 특히 [[평양부]] 주민들은 청나라군과 일본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후 평안도 경제가 파탄나고 세입이 전혀 되지 않아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406030290_01.jpg]]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