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일전쟁 (문단 편집) ==== [[황해 해전]] ==== 9월 17일 [[황해]](압록강 근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청은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군함 11척이 출전하였고, 일본은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군함 10척이 맞섰다.[* 어뢰정같이 배수량 1천 톤도 안되는 함선이나 전투 능력이 없는 수송선은 제외한 숫자]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 함대가 전체적으로 3천 톤 이상의 견실한 순양함들인 반면,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000톤 내외의 작은 순양함들이었다. [[파일:external/chinesestyle.up.n.seesaa.net/140314001-thumbnail2.jpg]] 다만, [[일본 제국]] 측은 기함 마츠시마마저 4천 톤대 순양함급이었던 반면에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천 톤이 넘었기 때문에 개함 전투 능력은 [[청나라]]가 좀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일본 연합 함대에 의해 패퇴하였다. 청나라 함대는 5척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 다만, 제일 중요한 정원과 진원은 정원이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이때 정원의 포술장으로 탑승하고 있던 [[리위안훙]]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반면에 일본 연합 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이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청군의 훈련 상태도 한몫하였고, 청군의 중소 구경 속사포 부족도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지휘관부터 [[아편]] 중독자에 청나라 순양함 '제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전 도주하였고 무장에서도 청군은 대구경 주포에서는 앞서 있었지만 중소 구경 속사포에서는 일방적인 열세였다. 그 결과, 초전부터 일본군의 명중률 높은 속사포 사격에 제대로 난타당하였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대영제국|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나라는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이때 청나라는 순양함보다 훨씬 큰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 보유했으니 안 사도 충분히 자국 함대가 강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중화사상|중화]]적인 자신감은 청일전쟁에서 그 동안 깔봐왔던 일본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면서 산산조각나지만.]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그래서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만 수비하라고 지시했다. 평양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청군이 졸전한 전투는 아니었다. 일본군이 전황을 주도한 것은 분명하나, 청군 또한 의도대로 일본군 단종진 일부를 끊어내는 데 성공하는 등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것은 아니었고, 상술했듯 중소구경 속사포 전력 열세 상황에서도 적잖은 전과를 올렸다. 전투 초반 청군 기함의 마스트가 피격되어 깃발 신호 지휘가 힘들어진 부분도 일본군의 상당한 행운이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도 4척 손상이 경미한 것만은 아니었고[* 특히 전투 종반 기함 마쓰시마는 진원의 주포에 피격되어 유폭, 57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다.] 피로 및 피해로 인해 즉각적인 추격은 포기했다. 또한 군령부 총장이 여객선을 타고 연합함대를 따라다니다 청군에게 고립당해 나포 내지 격침당할 뻔 하는 등[* 놀랍게도 청군 함선 사이를 돌파해 빠져나갔다. 같이 고립된 소형 포함 중 하나는 피격당해 함장이 전사.] 나사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황해 전투를 당당히 승리했고, 평양성 전투와 함께 이 전투는 대첩이 되었다. 이후 북양함대가 위해위에 틀어박히면서 일본은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지는 위해위 전투에서 북양함대를 궤멸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황해 해전은 일본군의 대승이 되었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의 가장 큰 문제는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을까 우려하여 일본군과의 전쟁엔 소극적으로 나섰다. 육군의 경우에는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의 경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 때문에 청군은 이홍장 휘하의 지휘관들이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다. 여기에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청군의 부패가 심화되어 장교와 병사들의 훈련도와 사기가 낮은 것까지 더해졌다. 그 때문에 일본군은 진격하며 아무 거칠 것이 없었다. 일본은 먼저 [[보하이 해]] 방면의 돌파구를 열기 위해 [[웨이하이]]와 [[뤼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