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첸 (문단 편집) ===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 ||[[파일:일급상장정잠.jpg]]|| || 일급상장 시절의 청첸 || [[중일전쟁]] 발발 이후 1937년 하북성과 산동성이 [[일본군]]에게 점령되면서 우한 방위를 위해 뤄양, 카이펑, 정저우, 쉬저우를 연결하는 1전구 방어선이 설정되었는데 1937년 7월 청첸은 1전구 사령장관 겸 하남성 정부주석, 천수 행영주임에 임명되어 뤄양에 사령부를 두고 2개 집단군 27개 사단, 30만 대군을 이끌고 5전구 사령관 [[리쭝런]]과 함께 일본군에 항전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이 거세 타이얼좡, 쉬저우 회전에서 일본군에게 어느 정도 피해를 주고도 결국 쉬저우를 잃게 되었으며 이후 우한 방어전에서 리쭝런과 함께 최외곽 방어를 맡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후 [[웨이리황]]에게 1전구 사령관 직을 내주었다.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지선]], [[리쭝런]], [[천사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9년 하남성 정부주석에서 물러났고 이후 충칭의 참모본부에서 전쟁을 수행했다. 이후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지냈다. 중일전쟁 종전 이후, 1948년 4월 23일, 238명의 추천을 받아 [[쑨커]], [[리쭝런]], [[위유런]], [[모더후이]], 서부림과 함께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부총통 선거]]에 출마했다. 4월 23일 오전의 투표에서 522표를 득표하여 3위를 기록했으나 [[쑨커]]를 지지하는 광동인들의 견제를 받았다.[* 난징의 구국일보는 청첸을 옹호하며 쑨커를 비판했다가 광동인들의 습격을 받아 본사가 파괴되는 일이 있었다.] 4월 24일 결선투표에서 600표를 얻었으나 여전히 과반수 이상을 득표한 후보가 없었다. 결국 4월 28일의 2차 결선투표에서 리쭝런이 1156표, 쑨커가 1040표, 청첸이 515표를 얻으면서 청첸은 결선투표에서 탈락했으며, 4월 29일의 3차 결선투표에서 1438표를 얻은 리쭝런이 부총통에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