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평댐 (문단 편집) == 역사 ==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청평댐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건설된 북한강 수계 최초의 댐'''이다. 수문만 24개이며, 높이가 31m, 길이가 470m인 대형 댐이다. 북한강 수계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댐이며. 1939년 건설에 착수하여 1943년 완공되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을 맞아 전시 총동원 체제에 들어간 [[조선총독부]]는 전력 공급원 확보를 위해 북한강 상류에 청평댐과 화천댐 건설을 서둘렀다. 화천댐은 청평댐보다 1년 뒤인 1944년 준공. 청평댐은 높이가 31m, 길이가 470m나 되는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세워졌다. 청평댐이 완공되어 북한강에 '''면적 12.5㎢''', '''저수량 1억 8,000만t''' 규모인 청평호반이 생겨났다. 이 댐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주민들이 '''근로 보국대'''라는 미명 하에 강제 동원되었다. 근로 보국대는 1938년 일제가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력 수탈 기구였다.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병과 징용 대상은 물론이고 학생·여성·농촌 노동력까지 원하는 대로 징발할 수 있도록 '''근로 보국대'''를 만든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보국할 국가가 없는 식민지 백성에게 ‘대일본제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명령했다. 1939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설악면을 잇는 대형 댐 건설 자재 반입을 위해 강을 가로질러 임시 다리를 만들면서 공사가 시작됐다. 청평댐 건설 공사는 '''카지마구미(鹿島組)'''[* 1840년에 설립된 카자마건설(鹿島建設)로 현재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되어 있다.]라는 일본의 건설회사가 진행했다. 그 당시 지역 주민들은 초기부터 공사 현장에 끌려 나와 엄청난 양의 모래와 자갈을 북한강 물에 씻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기초가 탄탄한 댐을 만들려면 골조부터 세척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다. 청평 수력발전소 정문 옆 언덕에는 공난자희생비라는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 건설회사가 공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세운 비석인데, [[쇼와]] 18년([[1943년]]) 8월 18일로 건립 일자가 적혀 있고 비석 뒷면에는 희생자 4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가평군에서 나오라기에 어쩔 수 없이 나왔거나, 먹을 것 부족한 시기에 점심밥과 저녁밥을 준다는 이유로 공사장에 왔다가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 청평댐이 완공된 1943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회사 전체의 전력을 일괄 통제하기 위해서 조선전업 주식회사를 세웠다. 2년 후 일본을 비롯한 [[일제강점기]]가 패망하고 난 후 청평댐은 남쪽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전력 공급원이 되었다.[* [[해방]] 당시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수력발전량은 북한의 4% 수준에 불과했다.] 이후 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인해 38선 이북에 있었던 [[파로호|화천댐]]으로 북한강 물을 막아버림에 따라 이 댐의 수력 발전은 큰 피해를 보았고, 남한은 심각한 가뭄과 전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6.25때 수복 못했으면 큰일날 뻔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 중반 북한에 의해 파괴되었다. 휴전 이후 복구를 하었다. [[1961년]] 조선 전업과 배전회사들인 경성전기와 남선전기가 통합되어 [[한국전력공사]]가 되었다. 이후 북한강 수계에 [[춘천댐]], [[의암댐]]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청평 수력발전소는 전국적 정전사태가 발생하면 작은 소수 차로 발전시설을 돌려 전국 발전소를 가동시킬 시 송전 발전소로 지정되어 있다. 청평댐의 건설로 생겨난 거대한 청평호반은 [[1970년]]대 수도권에서 손꼽는 유원지로 주목받았고, 이후 재벌들의 고급별장이 속속 들어서기도 했다. 근로 보국대원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시설용량 40만kW를 자랑하는 청평 수력발전소와 만수 면적 19㎢인 청평호도 [[일제강점기]]에 조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에는 청평댐 인근의 호명산 정상 부근에 인공저수지인 호명호수를 건설함으로써, 유휴전력을 이용해 청평호의 물을 호명호수로 양수하는 양수식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호명호수와 청평호 사이의 낙차는 550m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