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체코 (문단 편집) === 종교 === [[https://web.archive.org/web/20150221184947/http://www.czso.cz/sldb2011/eng/redakce.nsf/i/tab_7_1_population_by_religious_belief_and_by_municipality_size_groups/%24File/PVCR071_ENG.pdf|2011년 통계]]에 의하면 무응답 44.7%,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34.5%, [[가톨릭]] 신자가 10.5%, [[개신교]]와 기타 [[그리스도교]] 종파가 각각 1%와 1.1%이다. 그리고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무종교 인구는 최대 75%까지 된다고 한다. 체코가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9세기 [[동로마 제국]]으로부터였다. 초창기에는 동방 교회 소속이었으나 그 후 10세기 초부터 서방 교회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얀 후스]]로 유명한 국가치고는 현대에는 [[개신교]] 신자 비율이 낮고, 또한 [[유럽]]의 세속화를 감안하더라도 전체 그리스도교 신자 비율이 굉장히 낮은 편. 참고로 [[독일]]은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쳐서 적게 잡아 인구의 절반이고, 가톨릭과 개신교의 신자 비율은 비슷하다. [[프랑스]] 역시도 일단 가톨릭 신자 비율은 50%로, 명목상으로는 (옛날보다는 당연히 낮지만) 신자 비율이 낮지 않다. 이를 감안하면 체코가 얼마나 세속화된 나라인지 알 수 있다. 언어, 문화적으로 체코와 매우 가까운 옆동네 [[슬로바키아]]는 체코와 반대로 가톨릭 신자(62%)가 무신론자(25%)보다 훨씬 많다는 점에서 더욱 체코의 세속화가 두드러진다. [[파일:640px-Child_Jesus_of_Prague_(original_statue).jpg]]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에 있는 '승리의 [[성모 마리아]] [[가르멜 수도회|가르멜 수도원]]' 소속의 아기 [[예수]] 피난처 [[성당]]에는 체코 교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47cm 높이의 왁스로 만든 "프라하의 아기 예수"상이 모셔져 있다. 1628년 스페인에서 가져온 이 성상은 프라하를 지켜주며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 이 성상은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자들의 꾸준한 방문을 받고 있다. 성상에 아름다운 대례복을 입히는 것은 오래된 전통으로, 수년 간 다양한 의류업체로부터 아름답게 장식된 대례복이 기부되고 있다. 오늘날 아기 예수상은 전세계에서 기부된 70여 가지 이상의 맞춤 제작된 대례복을 갖고 있으며, 전례력에 따라 그날 맞는 색상의 옷으로 갈아입힌다. 그러다가 15세기에는 [[얀 후스]]의 영향으로 아예 보헤미아 내에 남들보다 100년 이른 [[개신교]] 개혁교회가 생기기도 했다. 이에 잇따라 루터회, 칼뱅주의도 주로 독일계 보헤미아 왕국 주민들 따라 대거 확산되며 1600년대쯤 들어가면 오히려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영향력도 강한 개신교 국가 중 하나였으며 가톨릭은 소수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에는 다시 인구 절대다수가 정통파 가톨릭이 되었다. 비록 개종을 거부하고 떠난 귀족들도 있었지만 30년 전쟁 말기가 되면 프라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서 스웨덴군의 진입을 저지할 정도로 재가톨릭화가 되었다. 이 변화 과정이 굉장히 빨라서, 체코의 재가톨릭화는 유럽 가톨릭 쇄신 운동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극적인 성공으로 통한다. 하지만 후스파의 역사는 근대에 다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주목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대통령인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는 후스주의를 장려했고,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중앙정부는 반가톨릭 친프로테스탄트 경향을 보였으며[* 다만 그렇다고 체코가 프로테스탄트화 되었던건 아니고, 1950년 시점에서도 약 75%의 가톨릭 신자가 있었다.[[https://en.wikipedia.org/wiki/Religion_in_the_Czech_Republic|#]]] 반대로 슬로바키아에서는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슬로바키아의 민족정체성을 지키는 역할로 변모되었다. 아무튼 개신교는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면서 완전한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으며, 개신교도들도 다시 양지로 나와 '체코 개신교 형제회'란 이름의 교단을 정식으로 설립하는 등 다시 전성기가 시작되려는 듯 했지만 2차대전과 공산 정권의 암흑기를 견디지 못했고, 결국 완전히 몰락했다. 민주화 이후로도 체코는 유럽에서 무신론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인데, 이는 공산정권 및 중세 이후 체코의 독특한 종교사적 경험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당연히 가장 눈에 뛰는 원인은 공산화(공산권은 공통적으로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였다.)이다.이미 체코는 20세기 초에도 산업화 등으로 세속화의 낌새가 보였지만, 그래도 인구의 3/4 이상의 신자가 민주적으로 교회를 옹호해주고 있었다.[* 「The Catholic Church came to find itself on the defensive, even though it still included more than three-quarters of the population, owned considerable property, and in the democratic circumstances of the years 1918-1938 was in a position where it could still have done something to counter this trend; and throughout the rest of the 20th century the decline in the number of its members and its power continued.」{{{[}}}가톨릭 교회는 4분의 3 이상의 인구를 포함하고 눈에 뛰는 재산을 소유했으며, 1918-1938년의 민주적 환경에서 세속화 추세에 대응할 무언가를 여전히 해볼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스스로를 수세(守勢)라고 파악했다.{{{]}}} Jan Spousta(2002). "Changes in Religious Values in the Czech Republic" 346p] 즉 오늘날 체코의 종교적 환경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역사적 경험, 곧 '공산화'에서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공산화'가 체코 세속화의 유일한 요인인 것은 당연히 아니다. 공산화를 겪고도 여전히 가톨릭의 영향력이 막강한 폴란드의 사례도 있거니와, 구 공산권 유럽국가 중에서도 체코는 유독 종교의 영향력이 약하다. 따라서 두번쨰 요인, 곧 체코의 독특한 종교사적 경험을 고려해야 한다. 체코는 다수종교가 중세말-근대초에 매우 급격하게 뒤집혔고 민족주의 혹은 외세와 얽혀있었다. 가톨릭의 경우 17세기의 재가톨릭화에 보헤미아인 스스로의 자발적 참여가 있었지만, 이것이 합스부르크 군주정의 종교 정책과 얽힌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이 재가톨릭화는 "합스부르크와 완전히 무관한 100% 자발적인 과정" 혹은 "보헤미아인의 의지와 무관한 100% 강요" 사이의 그 무언가에 위치한 것으로서,[* 애초에 [[리파니 전투]]에서 후스파 과격파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긴 것도 외세가 아닌, 후스파 온건파와 손잡은 보헤미아인 가톨릭 교도들이었다][* 이건 범위를 넓혀서 중세 말-근대 초 유럽의 종교사 전반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역사가 독일 민족과 구분되는 보헤미아인의 독자적 정체성과[* 개신교화가 되었다가 다시 재가톨릭화가 된 건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권 가톨릭 지역들도 함께 겪은 역사이다. 여기서 예외는 바이에른 뿐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등은 합스부르크와 아무튼 같은 독일 민족이므로 이후 가톨릭이 민족주의와 반목할 건덕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것(그래도 알프스 이남의 신앙처럼 인식하긴 했다)이 보헤미아와의 차이점이다.] 결합하면서 19세기 후 '가톨릭을 강요당한 체코 민족'이라는 독특한 민족주의적-반외세주의적 이야기를 형성했다. 반면 후스파의 경우,19세기 후 반독일-반합스부르크 정서와 결합하여 민족주의자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지만, 실상은 이미 한참 전에 인기를 잃고 역사적인 의의만이 남아있었다. 분명 체코에서 얀 후스는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크게 기억되고 교육되는 거인이지만, 근현대 체코인이 '후스파 신앙'을 다시 받아들인 건 아니다.[* 이건 한국의 상황을 이해하면 쉽다. 아무리 교과서와 정부 차원에서 [[동학]] 및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강조한다고 한들, 한국인이 천도교를 자기 종교로서 믿는 건 아니다.] 즉 체코의 여론 입장에서 보면, '가톨릭은 우리 할아버지가 출석하지만 외세와 얽힌 종교, 후스파는 역사책에선 강조하는데 내가 믿기엔 공감 안 가는 종교'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