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코/역사 (문단 편집) ==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 [[16세기]]에 들어서 희대의 영토 승계가 이루어지는데, 블라디슬라프는 늦은 나이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안나]]와 [[러요시 2세]]를 두었고, 이때 보헤미아와 헝가리를 오랫동안 탐낸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막시밀리안 1세]]가 접근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신의 손자, 손녀와 블라디슬라프의 딸, 아들을 결혼시키자 제의했고 안나와 [[페르디난트 1세|페르디난트]], 러요시 2세와 마리아의 결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된 러요시 2세는 누나 안나와 함께 막시밀리안 1세의 [[빈(오스트리아)|빈]] 궁정에서 자라났고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쉴레이만 1세]]가 헝가리 왕국을 침공하자 이를 막기 위해 친정을 떠난 러요시 2세는 [[모하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고, 러요시 2세의 매형이자 처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는 보헤미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새로운 보헤미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체코는 1918년 독립할 때까지 4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 제국|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도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1/3 정도만 차지했고, 헝가리 역시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거부한 동부 귀족들로 인해 오늘날의 헝가리 서부와 슬로바키아에 해당하는 1/3만 차지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 전역은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과 1713년 [[파사로비츠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수복했다.] 합스부르크 치하에서 보헤미아 왕국은 경제력이 가장 발달한 곳이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보다도 훨씬 부유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 반감이 컸다. [[페르디난트 1세]]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개신교 제후들에게는 관대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다스리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에서는 대항종교개혁을 시행해 개신교를 억압했다. [[루터교회]]에 호의를 보였던 [[막시밀리안 2세]]는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억압하지 않았지만, 외가인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에서 보수적인 가톨릭 교육을 받고 온 [[루돌프 2세]]는 [[프라하]]를 수도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억압했다. 여기에 민족감정까지 겹쳐서 보헤미아 왕국은 [[30년 전쟁]]의 발단 원인이 되었다. 보헤미아의 봉기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어 독일이 초토화된 것과는 별개로, 이 전쟁에서 보헤미아는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하고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옹립했다가 패배하여 복위한 페르디난트 2세의 더욱 강압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다. [[페르디난트 3세]]가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하여 30년 전쟁을 끝낸 1648년 즈음에 이르러 체코인 인구는 전쟁 전에 3분의 1도 안 되는 수준으로 감소하였다. 체코 민족주의자들은 30년 전쟁부터 18세기 말에 이르는 시점을 감소한 보헤미아인 인구를 대체한 독일인 이주와 [[독일/문화|독일화]], 경제 침체를 이유를 들어 이 시기를 암흑시대로 간주한다. 당시 상당수의 체코인 개신교도 귀족들은 추방당하고 영토가 몰수되었으며 독일인, [[헝가리인]] 등등이 이들의 영지를 접수하였다. 나중에 1781년 [[요제프 2세]]에 의해 [[http://en.wikipedia.org/wiki/Patent_of_Toleration|개신교를 관용하겠다는]] 선언이 나오긴 했으나[* 이 당시에 지어진 일명 '관용교회(toleranční kostel)'라는 것들이 현재에도 남아있다([[http://cs.wikipedia.org/wiki/Seznam_toleran%C4%8Dn%C3%ADch_kostel%C5%AF_v_%C4%8Cesku|체코어 위키]])] 반종교개혁 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아직도 체코에서 개신교 숫자는 가톨릭을 넘지 못한다. 물론 현재는 공산주의 시절 영향으로 무신론이 훨씬 많다. 아들이 없던 [[카를 6세]]가 사망하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벌어지자 보헤미아 귀족들은 [[바이에른 선제후국|바이에른]]의 [[카를 7세|카를 알브레히트]]를 국왕으로 선출하기도 했으나 카를 알브레히트가 얼마 못가 사망하자 [[마리아 테레지아]]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보헤미아 발전에도 심혈을 기울였고 그 후에도 보헤미아 왕국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상업적 기반을 바탕으로 합스부르크에 가장 중요한 세금 획득지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 지역이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에 중요했다는 것은 [[나폴레옹 전쟁]] 때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게 [[이탈리아 반도]]의 [[밀라노 공국]]과 현재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인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프랑스]] [[알자스]]와 [[독일]] [[슈바벤]] 일대의 [[월경지]] 외지오스트리아(Vorderösterreich)를 뜯기면서도 체코와 헝가리 등 가장 중요한 알짜배기들은 건사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자신을 버리고 카를 알브레히트를 지지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을 고깝게 여겼고 이후 보헤미아는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헝가리와 비교하여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체코에서도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었는데, 1815년 결성된 [[독일 연방]]에 보헤미아 왕국 전역이 포함되었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 문제에서도 문제지역으로 거론되었다. '[[대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 체코까지 포함한 독일국가를 세우면 독일민족이 아닌 체코인까지 영토에 포함시킨다는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순수한 민족국가의 성립이라는 '지상과제'가 [[중부유럽]]에서는 허상에 지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독일 통일]]은 1866~71년 사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도한 '[[소독일주의]]'통일로 귀결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통일된 '[[독일 제국|작은 독일]]'조차 민족적 순수성이 없었다. 왜냐하면 [[프로이센 왕국]] 영토인 [[동프로이센]] 남부와 [[서프로이센]], [[포젠]], 오버슐레지엔에는 [[폴란드인]]이 있었다. 게다가 1864년 프로이센에 병합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도 [[덴마크인]]이 거주했고, 1871년 합병한 [[알자스-로렌]]에는 [[프랑스인]]이 살았으므로 순수한 독일인의 제국이라는 이상은 결국 허상에 불과했다. 이는 보통 [[독일 통일]]이라는 거창한 사건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잘 조명되지 않는 문제다. 사족으로 오늘날 독일 동부 [[브란덴부르크]]와 [[작센]] 일부인 라우지츠 지역에는 현재에도 [[http://en.wikipedia.org/wiki/Sorbs|소르브인(Sorbs)]]이라는 슬라브계 소수민족이 약 6~7만 명 정도 살고 있다.] 아무튼 독일이 통일되면 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우세한 독일인에게 영원히 종속될 것을 우려해 체코인 독립운동의 대부인 [[프란티셰크 팔라츠키]]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의 초청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오히려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구조를 존속시키고 체코인이 여기에 협력해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대우받는 '오스트로-슬라브주의'를 제시했는데, 이는 1918년까지 약 70여년 간 체코인의 독립운동에서 가장 우세한 이론이 되었다. 이는 [[1848년 혁명|1848년의 독립운동]]이 좌절되면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오스트리아에 협력하는 것이 살아날 길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또 오스트리아가 억지로 해체되면 오스트리아를 흡수한 독일과 다른 슬라브족을 삼키려 드는 [[러시아 제국|러시아]] 사이에 낀 체코인이 좋은 꼴 보기 어렵다는 통찰도 반영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체코가 [[뮌헨 협정|당한]] [[프라하의 봄|수난]]을 생각하면 엄청난 통찰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팔라츠키의 제안은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무시당했고, 오히려 1867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대타협|헝가리를 오스트리아의 '파트너'로 선택하면서]] 체코인은 더 강한 억압을 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1881년 체코 지역 내의 행정기관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업무처리가 허락되고,[* 물론 쉽지는 않았다. 식당 메뉴판에 독일어를 적느냐 체코어를 적느냐 등 사소한 문제부터 의사당에서 독일계 의원들과 체코계 의원들이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는 등 크고 작은 말썽이 많았다.] 1907년 [[보통선거]]권이 인정되는 등 부분적인 타협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체코인도 제국 내에서의 '파트너'로의 승격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 이건 단순히 오스트리아 정부가 관대해서라기보다는 체코인들이 그만한 힘을 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19세기 말에 이르면 보헤미아 내의 주요 도시들은 모두 철도망으로 연결되었고 체코인들은 대부분 문맹상태를 벗어난 후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가장 산업화된 보헤미아 지방의 체코인들을 더이상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황태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대오스트리아 합중국|동등한 민족들의 연방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크로아티아 제국]] 방안도 논의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라예보 사건]]이 없었다면 진짜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다만 삼중제국 방안은 일단 크로아티아인에게만 동등한 주권을 주자는 논의였기에 만약 실현되었다면 체코인들은 자신들에게도 동등한 주권을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심지어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자 체코는 결국 분리독립을 추구하게 되었고, [[동맹국]]의 패전으로 [[1918년]] 11월 체코는 [[카를 1세]]를 폐위하고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 왕국]] 북부의 [[슬로바키아]]와 연계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당시 6만에 이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 러시아에 주둔하던 일부가 체코가 독립한 것을 듣고 귀국하려 하지만 당시 볼셰비키에 막혀 육로로 가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프랑스를 통해 체코로 가기로 하고 이 과정에서 더이상 필요 없어진 이들의 무기들을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에 주고 왔다.''' 이를 가지고 북로군정서군은 [[청산리 전투]]를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