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체코/역사 (문단 편집) == [[체코슬로바키아]] (1918~1992)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 이후 영국, 프랑스와 연계하여 의회주의를 발달시켜 점차 민족주의 [[파시즘]]이나 권위주의 독재국가로 돌입한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 연방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루마니아 왕국]], [[유고슬라비아 왕국]], [[폴란드 제2공화국]] 등 주변국들과 차이를 보였다. 그렇지만 체코슬로바키아도 존속기간 내에 자국 내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소수민족을 차별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물론 나치에 비하면 별 것 아니였지만. 이 시절 프라하는 "동유럽의 [[파리(프랑스)|파리]]" 소리를 들었다. [[1930년대]]가 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경제불황의 여파 속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게 영토할양 요구를 받는 등 이중고에 시달렸다. 체코와 독일의 접경지역인 [[주데텐란트]]에 다수의 독일인이 거주하니 이를 넘기라는 압박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믿을 수 있는 건 영국, 프랑스 등의 우방국 뿐이었지만, 전쟁을 막기에 급급했던 영프에게 체코는 철저히 관심 밖이었다. 1938년 뮌헨회담에서 독일은 유럽열강에게 주데텐란트의 할양을 공인받았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1939년에는 체코 전역을 합병, 슬로바키아를 [[괴뢰국]]화해버렸다(그 유명한 [[뮌헨 협정]]이다. 체코에서는 "뮌헨의 배신"이라고도 부른다). 사족으로 이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통령은 [[에밀 하하]]이다.[* 엄밀히 말하면 뮌헨 협정 체결 당시 대통령은 [[에드바르트 베네시]](Edvard Beneš)이다. 뮌헨 협정 이후 베네시가 퇴임하자 그 후임으로 대통령직을 이은 게 바로 이 에밀 하하(Emil Hácha) 대통령이며, 그는 독일이 체코를 합병한 뒤에도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명목상 대통령으로 남았다. 재임기간 동안 독일의 강압적인 통치에 항의를 표시하기도 했으며(비록 별 효과는 없었지만...), 외국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를 이끌던 전임자 베네시 대통령과 이따금 비밀리에 협력하기도 했다고 한다.] 곧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 중 체코는 공업력의 착취를 받았으며, [[유럽]] 전선에서 가장 최후의 전투도 체코에서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자 체코는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소련]]의 통제에 들어갔다. 전쟁 막판에 타결된 [[얄타 회담]]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이 거주하는 자국 동쪽 끄트머리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를 소련에 할양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전략적 위치가 가진 중요성 때문에 연합국은 폴란드와 더불어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자유선거로 신정부를 구성할 것을 소련에 요구했지만,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는 듣는 척하다가 결국 공산당의 쿠데타를 조종해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공산정부]]를 수립시켰다. 이 사건은 [[그리스]]와 [[튀르키예]]에서 진행된 공산당의 빨치산 게릴라, [[국공내전]]의 격화와 더불어 초기 [[냉전]]을 형성한 주요 사건 중 하나가 된다. [[1948년]] 공산당의 지배하로 들어간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에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으로 종속되어 위성국가로 전락한다. 특히 스탈린식 공산주의의 엄격한 통제와 폭압을 견디다 못한 체코인들은 [[1968년]] 이른바 '[[프라하의 봄]]'으로 스탈린 스타일 공산주의에서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보낸 군대에 의해 무차별 진압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럽의 좌파들은 소련에 대한 '환상'을 모두 버리게 된다. 프라하의 봄이 처절하게 진압당한 것과 벨벳 혁명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타 동구권 국가들과 달리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회복,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에[* 참고로 빈부격차가 크냐면 그것도 아니라서, 체코 같은 경우는 지니계수가 0.28 정도에 불과해 유럽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실제로 유튜브 등을 통해 1970~80년대 음악이나 영화, 방송등을 검색해 보면 생각보다 그렇게 억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으며 종교활동도 공산화 이전보다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지만 당시에도 대부분의 가톨릭, 개신교 교단들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미사와 예배 참석도 허용되었다.[* 체코 개신교단(ČCE)에서 쓰는 예전의식서(Agenda)의 현 형태는 공산체제 후반기인 1983년에 만들어진 것을 개정한 것이다.] 그리고 '카르비나'사의 킬스위치라는 게임이 공산정권과 연관되었다는 괴담 역시 [[https://gotgame.com/2014/01/02/gamebusters-myth-8-killswitch/|거짓으로 판명난 상태이다.]] [[http://olomoucky.denik.cz/zpravy_region/zkuste-sobotni-retro-denik-prinese-spoustu-vzpominek-na-zivot-pred-rokem-1989-20.html|공산정권 시절 체코슬로바키아는 슈퍼마켓이 존재했고]] 자본주의 국가들처럼 '''돈 주고 사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서독에 비교해서 떨어진다 해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동구권에서 [[동독]] 과 함께 경제력이 최상위였던 나라다.[* 냉전이 한창이던 1970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1972달러였고, 동독의 1인당 GNP는 1801달러였다.한편 서독은 2206달러였고, 미국과 소련은 각각 4304(...),1735달러였다. 한편 냉전이 끝날 무렵 체코슬로바키아의 1인당 GNP는 7,878달러로 [[대한민국]]의 4,600달러보다 훨씬 높았다. 참고로 소련의 1인당 GNP가 9,211달러, 동독이 9,679달러였다. 물론 공산주의 국가의 환율은 국가가 정하는 것이고 시장의 환율과는 괴리되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제한 주권론)에 의해 다시 통제당한 체코슬로바키아는 결국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소련의 실질 지배하에 있다가, [[고르바초프]]의 노선 전환으로 소련이 개혁에 착수하자 비로소 '해방'되었다. [[198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장경제 체제를 공식 도입하고, [[1989년]]에는 공산당 1당 독재가 종식되고 [[바츨라프 하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에 [[체코]]와 [[슬로바키아]] 사이의 갈등이 벌어지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양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평화적으로 분리, 독립하기로 결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