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공작전 (문단 편집) === [[리리싼 노선]]의 등장과 대도시 공략 전략 === 1928년 2월 코민테른은 집행위원회를 개최, 중국에서의 혁명이 퇴조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인정하며 노동운동의 활성화, 당조직의 재건, 토지혁명의 확대, 홍군의 건설에 주력함으로 새로운 혁명고조기를 준비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런 2월 결의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6차 당대회를 열고 10대 정치강령을 발표, 1. 제국주의적 지배의 종식, 2. 외국자본의 기업과 은행 몰수, 3. 중국의 통일과 민족자결권 확립, 4. '군벌적' 국민당 정권 타도, 5.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 6. 8시간 노동제, 실업구제와 사회보장제도의 실시,7. 모든 지주계급의 토지에 대한 몰수와 경작 농민들에게 토지 분배, 8. 병사생활의 개선, 9. 모든 잡세의 폐지와 통일적인 누진제의 실시, 10. 소련과 세계무산계급과의 연합을 내세웠다. 또한 '반혁명세력'이 강성한 상황에서 전면적 무장봉기를 시도한 것이 잘못이라면서도 앞선 봉기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퇴조기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곧 고조기가 도래한다면서 홍색정권의 수립과 농촌근거지를 확대하고 도시지역엣의 노동조합운동의 회복과 당조직의 강화를 강조했다. 또한 천두슈의 '우경기회주의노선'과 구추백의 '맹동주의, 명령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당의 무산계급화를 주문, 향충발을 총서기로, 저우언라이를 조직부장으로, 리리싼을 선전부장으로, 항영을 노동부장으로 임명하여 새로운 당 지도부를 결성했다. 리리싼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켜서 도시에서의 혁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930년 9월 중국 공산당 제6기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소집되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한 구추백과 저우언라이가 중심이 된 3중 전회에서 리리싼의 전국적 총봉기계획과 홍군의 도시진공계획을 중지할 것을 결정했고 리리싼의 모험주의적인 전술상 과오를 비판하며 도시가 아니라 농촌에서 혁명활동을 하여 차차 도시를 포위하자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의 도시 쟁취 전략을 시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창사를 점령하기도 했던 전과 때문에 공산당은 리리싼을 중심으로 꽤 견고하게 조직된 상황인지라 리리싼의 노선상 과오는 크게 비판되지 않았고 리리싼 노선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는 양상이 보였기에 리리싼을 모험주의적이라 불신했던 코민테른은 1930년 11월 16일 리리싼의 원칙적 과오를 지적하는 서한을 발송했다. 코민테른은 리리싼을 트로츠키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원칙적 과오를 저질렀다고 비판했고 혁명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인식 미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과소평가, 혁명무장력에 대한 과신으로 무모한 무장봉기를 획책해 중대한 손실을 저질렀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코민테른의 지적에 중국 공산당은 1930년 11월 말 중앙정치국회의를 개최하고 3중전회의 결정을 수정하여 리리싼 퇴진을 결의했다. 그리고 1931년 1월의 4중전회에서 왕밍, 진방헌, 심택민 등의 스탈린동방노동대학과 손일선중국노동대학을 나온 국제파, 소련유학파가 당권을 잡고 차 당대회 노선을 재확인, 농촌에서 홍군을 건설하고 토지혁명을 통해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해 도시지역의 노동운동과 당조직을 재건한다는 방침을 강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