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야권 (문단 편집) ==== 반론 ==== [[몽골인|몽골족]]인 [[원나라]]가 [[한족]]인 [[송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할 때, 한족의 반란이 두려워 가한 제재 중 하나이다. 그 당시 원나라가 가한 제재로는 여러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거나, 야간통금시간을 지정하기도 하고, 신분제를 만들어 한족을 하위 등급으로 만드는 것 등이 있었다. 또 다른 제재가 바로 초야권이다. 10가구의 한인(漢人) 당 1명의 몽골 병사의 시중을 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몽골 병사가 새로 결혼하는 한족 여성에 대한 초야권을 가지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한족의 신분이 [[노예]]와 다름없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처사였다. 그래서 한족들은 첫째 아이는 죽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실제로도 초야권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확실시되는 지역은 [[티베트 불교]]를 믿는 지역이다. 즉 동아시아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국교였던 중국 대륙에만 성행하였고 일본이나 한국에는 전파되지 못했다. 또한 명나라때의 불교도 후기 밀교인 탄트라가 사라져서 원나라때만 후기 밀교인 탄트라교가 성행하였다. [[티베트]]나 [[몽골]]에서 신부의 첫날밤은 라마교를 믿는 몽골 승려에 의해 행해졌다. 사실 밀교는 예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인데 8세기 힌두교의 성력이라는 개념이 불교에 전파되면서 샤크라 즉 성력을 중시하는 불교가 되었고 이는 성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던 불교에 성관계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좌도 밀교라 불리면서 그릇된 불교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성관계를 해야만 한다라는 해석으로 변질되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이런 폐단이 일어난 것이다. 몽골에서 초야권이 관습적으로 자리잡았던 이유도 티베트를 통하여 라마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좌도 밀교인 탄트라는 인도를 거쳐 티베트로 전파되었고 원나라 때는 라마교가 국교가 되어 원나라 각지에 주둔했던 몽골군에 의해 원나라에서 시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교] 몽골에서도 초야권이 관습적으로 자리잡았던 이유도 티베트를 통하여 티베트 불교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몽골의 초야권에 대하여 중국 쪽 기록만 있고 몽골에는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 몽골인들 자신이 쓴 기록 자체가 중국에 비해 적다. 그리고 19세기까지 티베트 불교를 믿었으며[* 지금도 티베트 불교가 주류이다.] 초야권이 성행해서 조선인이 매독을 고치러 파견 나간 적도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몽골의 원나라가 초야권이 성행하던 후기 밀교를 믿는 티베트에서부터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나서는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한 것이 문헌에 나타나 있고 정설로 되어 있다. 그것을 반대하는 중국 학자가 있다는 중국 사이트의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중국어를 할 줄 안다면 그 글은 사학자가 주장하는 것이 아닌 아닌 개인 블로그에 의한 반론이며 글 자체가 추측이고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신문에 칼럼도 쓰는 유명한 교육자 겸 중국 역사학자인 신리지엔(信力建)[* 1956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 출신 中山대학 졸업. [[https://baike.baidu.com/item/信力建|#]] ]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 몽골이 후기 좌도 밀교의 초야권이 성행하던 티베트를 점령하고 티베트 불교를 원나라의 국교로 삼았는데, 원나라의 몽골인들은 매우 열성적으로 티베트 불교를 믿었다. 또한 군인이자 라마승이기도 한 몽골인 군인 1명당 20호(20가구,100명)의 한족의 마을들을 감시하며 칼같은 철제 무기를 만드는지 감시했고, 한족들이 결혼하면 티베트 불교의 풍습으로 몽골 군인이 한족들이 결혼할 때 한족 여자에게 초야권을 행사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족들이 첫째 아이를 죽이는 풍습은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또한 몽골인이 한족에게 초야권을 행사한 것은 중국 문헌에도 나오고, 몽골은 19세기까지 티베트 불교가 성행하여 매독이 유행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한반도와 일본의 경우에는 티베트 불교는 퍼지지 못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워낙 대종교등 원래 있던 불교의 세력이 강해서 티베트 불교는 퍼지지 못했다. 하지만 몽골 공주가 결혼을 하러 왔을 때 어느정도 불교 건축물에는 티벳 불교 양식이 적용이 되었다. 또한 몽골 제국이 중국에 행성을 설치했던 것과는 다르게 한반도에는 행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입성책동]]이라고 하여 고려를 아예 원나라 영토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고려인들의 반대와 저항에 부딪쳐 모두 실패했다.]. 이 밖에 중국 웹에서 원나라,초야권만 검색해도 위에 내용을 뒷바침하는 중국 학자들의 주장들이 많이 나온다. 간혹 아마추어 블로그 등에서 '초야권이란 없었을 것이다.' 하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고 글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국 웹에서도 신리지엔이 쓴 글을 번역한 게시물이 검색된다. [[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3929?categoryId=4593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