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저항 (문단 편집) == 상세 == [youtube(VapS1Kt_LIM)] 초저항 구동음과 육성 안내 방송(1984년 6월)[* 한 일본인이 한국 방문 당시 직접 녹음한 것이다. 당시 [[새마을호]] 등도 녹음했으나 안타깝게도 녹음본들을 찾지 못했다. 해당 구간은 [[군포역]] → [[명학역]] 구간으로 [[금정역]]은 이 당시에 없었다. 금정역은 [[안산선]]이 개통한 1988년에 개통하였다.][* 당시에도 자동 안내 방송은 있었다. 허나 저 운행 계통의 안내 방송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육성으로 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선 전동차 자체를 만들 능력이 없고, [[기차]]도 [[증기 기관차]]와 [[객차]], [[화차(철도)|화차]]를 겨우 만들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을 통해서 [[수입]]했다. 하지만 한 번에 많은 편성을 도입하게 될 경우 자금 조달이 어렵다는 문제가 있어 여러 번에 걸쳐 도입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양한 차량 제조사들이 등장하게 된다. [[1974년]] 4월 [[수도권 전철 1호선]] 개통 당시, 일본에서 6량 21개 편성을 수입했으며, 이렇게 수입해 온 전동차를 수리, 분해, 결합 등을 하면서 쌓은 노하우로 [[1976년]] [[대우중공업]]에서 대한민국 제조 1호기 1x15편성 전동차를 제작할 수 있고, 이런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다양한 열차들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훗날 현대정공이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의 철도차량 제조사업부를 인수 합병하고 [[현대로템]]으로 분리되면서 축척된 노하우로 모든 철도 차량을 제작하고 있다.] 이후 계속 증차되어 [[1979년]]까지 총 6량 42개 편성이 도입됐다. 시운전은 [[1974년]] [[4월 9일]] 오전 10시에 중앙선 [[청량리역]] ~[[양평역(중앙선)|양평역]] 구간에서 이루어졌다. 1973년 6월 20일에 산업선 [[전기철도|전철]] 구간이 첫 개통되었는데, 그 구간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4090032920701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4-09&officeId=00032&pageNo=7&printNo=8778&publishType=00020|시운전 당시 기사 1]]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4040900209207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4-04-09&officeId=00020&pageNo=7&printNo=16159&publishType=00020|시운전 당시 기사 2]]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62000099207001&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73-06-20&officeId=00009&pageNo=7&printNo=2244&publishType=00020|청량리 ~ 제천 간 개통 기사]] 처음은 6량으로 운행했다가 [[1981년]] 8량을 거쳐 [[1986년]] 최종적으로 10량으로 증결됐다. [[경원선]] 용산 ~ 성북 구간을 운행하기 위해 4량으로도 있다. 당시 일본의 통근, 근교형 전동차의 사양을 적당히 섞어서 한국 사정에 맞게 부분 변형해 투입됐다. 101계를 필두로 도입된 전형적인 일본식 통근형 전동차의 4도어 형식 8개 출입문과 3-4-8-2-3 형태의 좌석 배치, 슬라이딩 방식의 미닫이 객실 간 출입문이 적용되어 있고, 강철 재질 차체와 직병렬조합 약계자 저항제어, SELD 제동 또한 전형적인 일본 국철 차량의 영향을 받아 설계되었으나 고속주행에 조금 더 적합한 설계가 이루어져 있다.[* 의외로 그 당시 차량들 중에서는 고스펙이다. 당시 일본 국철의 [[103계 전동차|통근형]], [[113계 전동차|근교형]] 전동차의 최고 속도는 100km/h였다. 사철 차량들도 대부분이 최고 속도가 100-110km/h정도였다.] 일본의 [[철도 동호인]]들이 좋아하는 한국의 열차 중 하나이기도 했다. 도쿄 지하철 [[도쿄메트로 5000계 전동차|5000계]]나 도큐 [[도큐 8500계 전동차|8500계]]와 매우 흡사한 식빵형 전두부를 지녔으며[* 특히 5000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80% 비슷하다.] 그 외에도 일본 국철 [[101계 전동차|101계]], [[103계 전동차|103계]], [[EV-E301계 전동차|301계]] 등과도 비슷한 상자형 전두부 모양과 내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동안 국내에서 운용되는 유일한 중문 열차였다.[* 현재 초저항 Tc 차량 전량과 객차 대다수가 폐차되었다.][* 대신 [[서울교통공사 광폭형 GEC 초퍼제어 전동차]], [[신분당선 D000호대 전동차]], [[인천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 [[대구도시철도공사 3000호대 전동차]]가 비상 탈출용으로 중문을 채택했다.] 원래 서울 지하철의 계획은 여러 편성의 전동차를 병결하여 운행하려고 했다. 이는 [[러시아워]] 시간대에는 전동차 2~5편성 정도를 붙여 많은 승객을 나르고, 평시에는 6량 1개 편성으로만 운행해서 배차 운영을 유연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지하철이라는 물건이 너무 신기하였고, 지하철의 장점이 너무 부각되면서 예상했던 것에 비해 [[가축수송(교통)|상당량의 승객이 넘칠 정도로 늘어나서]] 1989년부터 10량으로 증결했고 사실상 [[흑역사]] 중 하나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지하철 개통 후 1980년대 말까지 서울의 지하철은 러시아워 기준 '''250%~300%의 혼잡률'''을 매우 흔하게 기록하던 때이다. 참고로 현재 서울 지하철에서 가장 혼잡한 2호선 사당 ~ 방배 구간의 러시아워 때의 혼잡률이 224% 정도이므로 250%~300% 정도이면 엄청난 수치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자주 열어 줄 계획이 있던 문이었던지라, 나중에 밀폐가 잘 안 되어 [[바람(기상)|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문제점이 있었다. 냉/난방 시설은 상당히 떨어진 편이었다. 1986년 최종 도입분까지 에어컨 없이 모두 '''선풍기'''였고, 이는 당시의 극심한 혼잡률과 함께 여름철 지하철 통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원인이 되었다. 당시 신문에 심심하면 냉방화 요구가 기사나 독자 기고란에 올라올 정도였다. 결국 1987년부터 차내 냉방 장치를 에어컨으로 개조하는 사업이 진행되어 대부분의 열차들이 에어컨으로 개조되었다. 개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개조 차량은 냉방 성능이 매우 열악했으며, 일부 차량에서는 에어컨에서 나오는 냉각수가 열차 내부에 떨어지는 등의 문제도 발생하였다. 게다가 저항 차량 특성 상 가감속시 엄청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지하 구간의 '''찜통 더위'''는 여전히 개선되지 않았다. 따라서 초기 개조 차량은 선풍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에어컨만 있었으나, 개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못하자 후기 개조 차량에는 에어컨과 보조 냉방으로 선풍기를 추가로 달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