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초혜왕 (문단 편집) == 왕위 계승과 백공 승의 난 == 초 혜왕 2년(기원전 487년), 영윤 자서는 초나라 태자 건(太子建)의 아들 웅승(熊勝)을 받아들여 백읍의 공으로 임명하고 이때부터 그는 백공 승(白公勝)으로 불린다. 백공 승은 적극적으로 민심을 사며 병사를 기른다. 초 혜왕 6년(기원전 483년), 백공 승은 [[공자 신|영윤 자서]]에게 [[정나라]]를 치자고 권했다. 그 이유는 부친인 태자 건이 정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정공]]을 몰아내고, 초나라를 치려는 기반으로 삼으려다가 발각되어 죽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오자서]]가 힘들게 백공 승을 데리고 오나라로 달아나게 된다. 오자서 밑에서 자라며 보고 배운 탓인지 이 왕손 웅승도 대단히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자서의 대답은 차가웠다.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 당연히 이 처사에 백공 승이 분노하여 자서에게 원한을 품었다. 일설에는 산책하던 중에 초나라 왕실에 어떻게 복수할지 골몰하다가 짚고 있던 지팡이를 거꾸로 쥐어서, 뾰족한 끝에 턱이 찔려 피를 줄줄 흐르는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초 혜왕 8년(기원전 481년), 정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진(희성)|진(晉)나라]]가 정나라를 치자 정나라가 급히 구원을 청했다. 초 혜왕은 자서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고 자서는 정나라와 결맹한 후 돌아온다. 초 혜왕 9년(기원전 480년) 여름, 자서와 자기를 보내 [[오(춘추시대)|오나라]]를 공격한다. 초 혜왕 10년(기원전 479년) 7월, 백공 승은 석걸 등 용사를 모아 영윤 자서와 사마 자기를 죽이고 혜왕을 협박한다. 석걸이 혜왕을 죽여야 한다고 조언하지만 백공은 따르지 않는다. 백공은 자려를 왕으로 세우려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자려를 죽인 후 혜왕을 데리고 고부(高府)로 간다. 석걸이 고부의 문을 지키는데 어공양(圉公陽)이 땅굴을 파 혜왕을 업고 소부인[* 소왕의 아내이자 혜왕의 어머니인 월희를 뜻한다.]의 궁으로 도망간다. 한편 채나라에 있던 섭공(葉公) [[심제량]](沈諸梁)이 백공의 모반 소식을 듣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온다. 섭공이 길에서 잠윤 고를 만났는데 그는 백공과 합류하기 위해 사병을 이끌고 가는 중이었다. 섭공이 그를 꾸짖자 잠윤은 섭공을 따른다. 섭공은 잠윤을 보내 국인들과 함께 백공을 공격하도록 하고 백공은 산으로 도망쳐 목을 매 자결한다. 백공을 따른 석걸 등은 처형되고 백공의 아우 왕손연(王孫燕)은 오나라로 도망간다. 난이 진압되고 초 혜왕은 조정에 복귀한다. 심제량은 영윤과 사마를 겸직하다가[* 영윤 자서와 사마 자기가 둘 다 죽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안정되자 자서의 아들 [[공손녕|녕]](寧)을 영윤으로, 자신의 아들 관(寬)을 사마로 삼은 후 섭 땅으로 은퇴한다. 여담이지만 이때 진(陳)나라가 이 혼란을 틈타 백공을 지원했다가 실패했고 이는 진나라의 멸망을 초래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