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 (문단 편집) === 재상중심정치 === [include(틀:촉한사영)] [[유비]]가 죽은 뒤로 [[이엄]]마저 실각하자 [[제갈량]]은 [[상국]]으로서 나라 안팎의 모든 일들을 모두 다루었다. 제갈량은 [[승상]]으로서 외정, [[녹상서사]]로서 내정을 틀어쥐었는데 중앙의 행정, 인사[* 실제로 [[유염]]과 [[이막]]을 내지로 돌려보냈고, [[요립]]과 [[이엄]]이 제갈량이 죽자 한탄했던 것은 제갈량이 등용과 탄핵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따름이다.], 군사, 외교를 모두 총괄하였다. 또 익주목을 맡았는데, 나라 전체가 [[익주]] 하나였던 촉한에서 익주목이라 함은 곧 지방 행정과 군사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만약 간사하게 죄를 범한 자와 충성스럽고 착한 일을 한 자가 있다면, '''마땅히 유사[* 有司, 해당 관원.]에 회부해''' 그 형벌과 상을 논하도록 하여 폐하의 평명[* 平明, 공명정대.]한 이치를 밝혀야 하며, 사사로움에 치우쳐 안팎의 법이 서로 달라서는 안 됩니다." >---- >제갈량, 『[[출사표]]』[* [[http://rexhistoria.net/index.php?_filter=search&mid=history_sam&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C%B6%9C%EC%82%AC%ED%91%9C&document_srl=1307|출처: 파성넷]]] 제갈량은 전출사표에서 나라를 걱정하는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지만, 이때 관리를 감찰하는 직책인 [[사례교위]]는 바로 '''제갈량 자신'''이었다. 다시 말해서, 관원에 대한 상벌을 관련 감찰기관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제갈량의 요구는, 곧 제갈량 자신의 판단에 맡겨두라는 뜻이며, 유선이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지 말라는 요구였던 것이다.[* 홍윤기. (2017). <出師表>에 나타나는 諸葛亮의 독재정치. 중국어문논총, 84, 183-208.] 또 전출사표에서 제갈량은 [[환제(후한)|환제]]와 [[영제(후한)|영제]]의 예를 들어 말하는데, 이로 보아 황제의 친위 세력이 되는 환관들을 정치 전면에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했던 듯하다. >丞相亮將北征,住漢中,慮後主'''富於春秋,朱紫難別,''' 以允秉心公亮,欲任以宮省之事。 >승상 제갈량이 북벌에 앞서 [[한중]]에 주둔했을 때, 후주가 '''어려서 뭐가 좋고 나쁜지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동윤이 마음이 공명하였으므로 그에게 궁궐의 일을 맡기려고 했다. >---- >[[진수(서진)|진수]], 『[[정사 삼국지]]』, 동윤전(董允傳)[*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7478|출처: 파성넷]]] 이에 상해대학 교수인 주자언은 『성단에서 걸어 내려온 제갈량: 삼국사신론』에서 "이는 완전히 '''기군(欺君) 행위'''이다. 나아가 이렇게 탄식한다. 세상 사람들은 조조가 주군을 괴롭히고, 한 헌제를 손바닥 안에 쥐고 있었다 말하지만, 왜 제갈량의 기군 행위는 보고도 못 본 척하는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라고 기술하였다. 유선은 이렇게 임명된 동윤을 두려워하고 꺼렸으며, 언제 한번은 이처럼 비꼬기도 하였다: >"'''정치는 갈씨(葛氏)에게서 비롯하고 제사는 과인(寡人)이 맡겠소.'''" 제갈량 또한 유선이 정치에 익숙치 않다 여겼으므로 마침내 안팎을 총괄했다. >---- >[[진수(서진)|진수]], 『[[정사 삼국지]]』, 후주전(後主傳)[*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1291|출처: 파성넷]]] [[유선(삼국지)|유선]]은 따라서 황실 의례를 맡을 뿐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은 다음인 [[장완]] 시대부터 승상부를 설치하지 않고 정사는 [[상서령]], 군사는 [[대사마]]와 [[대장군]]이 이끌도록 나누었으며, 비서령으로 하여금 상서령과 균형을 유지토록 했다.[* 이때 [[극정]]이 비서령으로 있었으며, [[황호]]와 같이 일했다.] 또 유선이 신권 1인자에게 북벌에 필요한 개부(開府)를 명령한 것을 보면, 이때 재상의 실력이 상당히 깎였던 것으로 보이고, 동윤이 죽은 뒤에는 [[황호]]를 내세우며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에 이른다. 촉한에서 이렇게 재상중심 정치가 가능했었던 까닭은 재상을 견제할 세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황후]] [[감부인]]은 일찍이 죽었으며, [[종실]]인 [[유봉]]은 자결당했고, [[장비]]는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당했다. 무엇보다 [[유비]]가 권력 승계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죽었다. >유선이 집권한 뒤, 정책은 제갈량에 의해 주로 진행되었다. 그는 조정 내에서 규범을 제정하고 대신을 훈계하며, 조정의 풍토는 청렴하고 인심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촉한의 경제는 해마다 위나라와 싸워도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다."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제갈량은 세상을 떠난 뒤에 촉한의 백성들이 그리워했으며, 그 치국 능력과 효과는 당세와 후세에 매우 잘 알려져 있다. 제갈량이 죽은 뒤에도 장완, 비의, 동윤, 강유 등이 제갈량의 정책을 이어갔고, 이후 유선은 환관 황호를 총애해 조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촉한이 멸망할 때까지, 지방의 정치 풍토는 청렴했다. >---- >조곤생(趙昆生), 『삼국 정치와 사회(三國政治與社會)』 제4장 《촉한의 정치와 사회》 제1절 《촉한 정권 출현의 특정과 방식》 그래도 이들이 정권을 잡은 동안 정국은 안정되었고 큰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건전한 재상 중심 정치, 어떤 사람은 권신의 독재 정치라고 생각할 것이나, 판단은 각자 하는 것이다. 다만 위에 언급된대로 제갈량이 권신이냐 아니냐 여부는 각자 판단할 노릇이고 촉한의 제갈량이 후한의 조조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건 사실이나, 둘을 같은 류로 보는 것은 정확한 평가가 아니다. 조조는 스스로 찬탈을 하진 않았으나 조정을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고 구석을 받는 등 명백히 후한 황실의 권위를 무시하고 역신으로 볼만한 행위를 계속했다. 헌제는 이름만 남아있었고 그렇기에 조조의 사후에 갓 위왕으로 즉위해 사실상 아무 업적도 없던 조비가 쉽게 제위를 선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으나 촉한 황실의 권위는 절대적이었고, 자기 파벌을 키우거나 역심이라고 볼만한 행위를 한 적이 없으며, 당연히 그가 역신이라는 평가도 없다. 즉 제갈량이 권신이라고 쳐도 그는 충신인 권신이었던 셈이다.[* 이 점은 제갈량 항목에 자세히 설명되었다시피 후한 황실(=의 껍질을 뒤집어쓴 위나라)를 바닥부터 스스로 다져온 조조와 촉한의 개국공신 중 하나 정도의 위치인 제갈량의 차이이다. 제갈량이 걸출한 인물인 것과 별개로 촉한은 누가봐도 유비가 세운 나라였으며, 촉한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유비의 사람들이었기에 제갈량이 힘을 쓰기 위해선 황실의 권위를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제갈량이 조조처럼 황실을 능욕하지 않은 것이 진정한 충신이어서였는지, 그렇게 할 수 없어서인지는 후대사람들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그의 행적을 보면 역신이었던 조조와 크게 대비된다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