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 (문단 편집) === [[인구]] === >고민 선생의 『위진남북조경제사』에서 촉한의 조세 제도는 아직도 구전산부제[* 口錢算賦制, 인구에 따라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로, 이것은 촉한이 한나라 제도를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조위]]의 [[중국사/세금%20제도#s-8|호조제]]와는 달리 호별로 세금을 징수했다.]일 가능성을 고증한 바 있다. 양문리는 촉한에서 세금을 인구별로 걷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인구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촉한 정부의 경제 부담은 인구를 숨기지 않는 양민에게 전가되어, 점점 더 많은 인민이 인구를 숨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 >오기림(吴奇霖), 촉한의 흥망성쇠 50년 [[https://baike.baidu.com/item/%E8%9C%80%E6%B1%89%E5%85%B4%E8%A1%B0%E4%BA%94%E5%8D%81%E5%B9%B4/53181917?fr=aladdin|#]] >또 제갈량이 죽은 뒤에 군대의 병사들이 도망가서 서로의 이름을 사칭하여 간사하게 법을 어긴 자가 적지 않았다. >---- >[[진수(서진)|진수]], 『[[정사 삼국지]]』, 여예전(呂乂傳)[* [[http://rexhistoria.net/history_sam/7483|출처: 파성넷]]][* 그러나 촉한과 비슷한 사례가 조위와 손오에서도 있기에 촉한만의 문제는 아니다.[[http://rexhistoria.net/history_sam/2593|고유전]]] [[후한]] 때 익주 서남부인 영창군의 인구만 무려 189만 명에 달했고, [[조조]]는 [[장로]]를 격파하고 파동군과 파서군의 인구 8만 명을 이주시킬 정도로 파촉은 본래 그 인구가 많았으며, [[중원]]의 전란을 피해 촉 땅으로 들어온 인구와 [[유비]]의 세력을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이었다. 그러나 잦은 전란과 행정망의 붕괴 때문에 인구가 급감하였고, 이에 [[두우]]의 주석에 따르면 [[221년]]에 호구는 20만에 인구는 90만이었다고 하며,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멸망 직전에 호구는 28만에 인구는 94만, 군사가 10만 2천에 관리가 '''4만'''이었다.[* 비교하자면, 오나라의 인구가 230만이고 관리가 3만 2천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