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촉한 (문단 편집) ==== [[농업]] ==== 유비는 대규모 둔전 위주 정책을 펼치는 대신 주군의 농업 경제 육성과 발전에 힘썼다. 일례로 익주 평정 후 성도의 토지와 저택 등을 상으로 내리자는 건의에 [[조운]]이 '밭과 집을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생활이 안정된 뒤 역조(役調)를 지운다면 백성들도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유비는 조운의 의견을 받아들여 농업 발전의 기본 정책으로 삼았다. [[제갈량]]은 민심을 흐트러뜨리지 않게 해야 안심하고 농업생산에 종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백성들을 쉬게 하고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다. 또 농사의 풍작을 위해 농토 수리 관개 사업을 매우 중시했다. [[도강언]]은 서촉 농업의 명맥이었다. 제갈량은 이곳의 수리 시설을 계속 유지, 보수, 신축하였다. 또한 익주의 경제는 중원과 같은 심각한 파괴를 당하지 않았고 유비와 제갈량 통치하에서 안정을 찾았기 때문에 둔전의 규모도 위, 오만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군량미 환적의 번거로움을 줄이고 소농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익주에는 [[도강언]](都江堰)을 위시하여 양전언(楊塡堰), 오문언(五門堰) 등의 수리 시설이 홍수방지 및 농업용수 공급에 큰 소임을 해내고 있었다. 제갈량은 이런 수리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새로 쌓아 농업의 관개를 보장, 생산량을 늘리고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고 농사시기, 세금와 역을 적절하게 하여 농민이 농사일에 전념하도록 하였으며 수공업도 장려하였고 소수 상공인에게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억제하였다. 제갈량은 '무농식곡(務農殖穀)'과 '이부민재(以阜民財, 백성들의 재물이 늘어나도록 한다.)'라는 정책을 주장하였다. 촉땅은 강이 수량이 많고 들판이 비옥한 데다가 제갈량의 정성스런 관리로 농업 생산량이 매우 높아졌다. 도강언 관개구에 있는 면죽(지금의 덕양), 광한 일대의 논은 묘(亩) 30곡(斛) 이상이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전사(全史) 제32권 중국위진남북조경제사(中國魏晉南北朝經濟史), 1993년, 인민출판사.] 제갈량은 남중의 영창군 법보산(法寶山) 아래(오늘날의 운남성 보산시) 제갈언(諸葛堰)을 건설하기도 했다. 또 그와 동시에 제갈량은 [[촉과]]라는 법률을 통해 엄정한 사회기풍을 강조했고 '촉 땅 인사(호족)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스스로 방자'하지 못하게 해 '강자가 약자를 침범하지 않았고' 이로서 백성들의 생활을 보호하였으며 호족 세력이 농민을 침탈하는 것을 막았다. 4차북벌 이후 권농강무(勸農講武, 농사를 권하고 무예를 강습함)하고 목우유마를 만들고 군량미를 운반하여 야곡구에 쌓아놓고 야곡구에 있는 식량창고인 저각을 수리하였다. 이후 백성들과 군사들을 휴식시켰는데(식민휴사, 息民休士) 이로서 3년후에 사용하였다(三年而用後之). 이는 제갈량이 남정할 때와 같으니 백성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부여하려는 것이다. 또 제갈량은 [[두미]]를 초청하며 '잠시 국경을 닫고 농업을 권장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길러 자라게 하고 아울러 갑병을 다스리며 조비의 군대가 피로해질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 토벌한다면, 병사들로 하여금 싸우지 않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수고롭지 않게 하고도 천하는 평정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제갈량은 백성들이 풍족한 생활을 하고 국가는 튼튼한 재정수입이 확보되어야 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엄격한 군사훈련을 통한 강병을 길러 적을 격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의미한다. [[원준]]은 이렇게 말했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는 백성들이 항상 밭두렁을 일구어 창고에 식량이 가득했고, 무기를 예리하게 갈아 유사시에 대비를 했다. 조회를 할 때는 떠드는 사람이 없었고 길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이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